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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Nov 05. 2024

덤으로 사는 인생

소중한. 소소한.

11월 4일. 


< 밀라노. 11월 5일 새벽 >


밀라노에서 칼 맞아 황천길 건널 뻔한지도 어느덧 정확히 1년이 지났다.


업적으로 따지자면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인간적으로는 성장해가고 있음에 만족하는 요즘이다.


일상은 단조롭다. 취침 전과 기상 후 한두 시간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느라 낭비하기도 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비교적 알차게 보낸다. 수업이 있으면 듣고, 과제가 있으면 미리 처리하며, 시험이 있으면 한 만큼 친다. 오후 2시 30분 전후로 30분 정도 낮잠을 자고 적어도 7시간 이상의 수면을 취한다. 외국어 공부도 조금, 독서도 조금, 그리고 매일 적게는 30분에서 2시간씩 글을 쓴다.


 4시간에서 5시간만 최대로 집중해 일을 해치운다. 효율이 올랐고, 역량 밖의 일은 과감히 피한다. 물론 항공역학은 지난해, 도 닦는 심정으로 4-5번씩 읽어야 할 때도 있지만 이게 내 밥벌이라 생각하면 적어도 이해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식단도 단순하다. 계란후라이에 밥 한 공기, 바쁘면 학교에서 칙필레나 판다 익스프레스 따위로 때우고, 보통은 라면을 끓여 먹는다. 밥까지 말아먹으면 탄수화물의 향연에 수명이 주는 것 같지만 지금은 여행이 우선이다.


< 피사, 바야히베, 엘 팔마르시토 >


거창했던 인생의 목표도 소박해졌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마음 맞는 사람과 사는 것. 가끔은 여행하고, 요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아이들을 키우는 삶을 꿈꾼다.


그간의 나는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해 왔는데, 그 습관으로부터 멀어지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물론 내년 겨울방학의 여행지(간다면)와 항공료는 이미 계산해 뒀지만, 이는 순수히 경제적인 상황에 기인하고, 언제 칼 맞아 (여기서는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 그냥 순간을 충실히 살자, 그리고 되도록이면 고점에서 죽자의 마음가짐이다.


사실, 외면하고픈 마음도 있다. 하루를 충실히 살아야지, 취업이니 취직이니 하는 것들은 무겁게만 느껴지고 고민한들 달라지지도 않는다.


< 그리스, 칼라바카에서 다시 아테네로 >


작년 11월 이후로, 덤으로 산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소한 순간들에서 행복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그간의 여행은 도파민 회로를 망가뜨려 나를 무던하게도 바꿨고,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웹툰 한 화를 보더라도 환하게 웃으며 보고, 신라면을 한 가닥 먹어도 탱글거리는 면발을 만끽하려 한다. 가끔 이어폰을 빼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의 가을바람을 들이켜고, 어제와 오늘의 공기가 다름에 감사한다. 아직 순간을 즐기는 것이 서툴지만, 그리고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엔 멀었지만, 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유이한 고민은 돈과 가족 정도이다. 여행 예산을 미리 잡아둔 탓에 식단은 4종으로 단출해졌고, 다가오는 겨울을 맞아, 저렴한 침낭이 이불의 대체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짧게 봐도, 길게 봐도 늘 걱정이다. 인간관계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해외에 있으니 아버지와 통화할 기회가 적어 안부를 어머니를 통해서나마 전하고 있지만, 직접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한다. 장기적으로는 결혼을 꿈꾸지만, 지금의 처지에 연애는 사치라 마음이 가더라도 접고, 나 자신이 오롯이 서는데 집중하고 있다.


다만 요즘 친구를 만나거나 새로운 사람을 사귀게 되면 꼭 던지는 질문이 있는데, "5년 후의 모습이 그려지나요?"라는 질문이다. 재작년 정도까지만 해도, 미국 어디선가 공학자로 개미처럼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지만, 요즘은 4년 후 스리랑카의 서핑캠프에서 일하고 있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아 조금 불안하다. 그러나 이 역시 결국 내가 답해야 할 물음이고, 우주항공을 사랑하지는 않아도 열심히 노력해 좋아하니 여타 졸업생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 이집트, 몽골, 몽골, 조지아 >


유럽에서의 시간 이후 발전에 대한 열망이 준 것도 문제라면 문제겠다. 글은 그래도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쓰고 있으니 길게 보면 어디든 다다르지 않을까. 


때로는 어디 오두막에 들어가 낚시하고 책이나 읽으며 살거나,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매일 오전 소금물에 몸을 적시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과 돈이 고플 것 같아 상상에만 그친다. 이럴 때는 관성이 편리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리 잡은 배움의 관성은 병으로 따지자면 중증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게 불가능해 결국 나는 오늘도 쳇바퀴를 돌린다.


어렸을 때는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여겼고, 잘난 맛에 살았다. 지금은 여행을 조금 많이 다닐 뿐,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졸렬하고, 남들 몰랐으면 하는 습관도 더러 있고, 심지어 때로는 이기적이지만 이런 내 모습이 싫지만은 않다.


< 북유럽에서 한 컷 >


카뮈의 책에서 '죽음의 부조리를 경험치 못한 청춘은 내일의 당연함을 가정한 채 살아간다.'라는 구절을 읽었는데, 나는 이를 경험한 쪽이라,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죽음에 대한, 죽을 뻔했던 날의 기억으로 인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다. 어찌 보면 강박적으로 여행하는 이유, 쫓기듯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기도 하겠다.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다. 건강을 염려해 주는 친구도, 현실감각을 일깨워주는 친구도, 그저 취미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친구도, 언제고 기댈 수 있는 친구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든든히 믿고 지지해 주는 가족이 있다. 모두 감사한 일이다.


< 외시넨 호수, 깔랑크 국립공원 >


내년, 내후년, 그리고 2029년 11월 4일의 내가 생존 n주년을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기념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감사할 수 있길 바란다. 덤으로 사는 인생, 마음은 간사해 만족은 평생 요원하겠다. 그럼에도, 불만족스럽지는 않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며, 다가올 날들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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