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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un 06. 2023

무단거주한 세입자(1)

계약한 적 없는데, 월세라도 낼래요?

 80년대 지어진 구축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의 일이다. 신축아파트에 살다 이사한 거라 이삿짐을 정리하는 내내 비교체험 극과 극을 느끼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지내다가도 문득, 불쑥, "맞아, 옛날 우리 집 이랬지. 이모네 집 이랬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신축아파트와 구축아파트의 차이점을 들자면 30분은 족히 말할 수 있지만 일례로 엘리베이터만 놓고 보자. 신축아파트는 현관을 나서기 전에 미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 바로 탈 수 있지만, 축아파트는 엘리베이터 앞에 가서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한다. 오르내리는 속도 차이는 당연한 거고. 수용인원도 다르다. 고층에서 누가 엘리베이터에 유모차라도 싣고 내려오면 아래층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한 번 더 기다려야 한다. 그 밖에도 이중삼중 주차장에 적응해야 하고, 추위와 싸우고 습기에 대비해야 하는 등 21세기를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많았다. 그래도 남편 직장 가깝고, 큰 공원이 있는 동네라서 좋았다. 집의 쾌적함 대신 주변 환경의 편의성이 있었다.


 이삿날은 따뜻하고 화창한 4월 어느 날이었다. 무사히 이사를 마치고 하루 이틀이 지났다. 저녁이면 무슨 소리가 들렸다. 우우- 그릉그릉- 그릉그릉- 반복되는 소리. 구축이라 나무도 크고 공원도 있어서 자연의 소리가 잘 들리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 등원시키고 혼자 집에 있는데 또 그 소리가 들렸다. 그릉그릉. 베란다에 나가보니 옆 동 옥상난간에 비둘기 두세 마리가 나란히 쪼르륵 앉아있었다. 우리 집은 15층 꼭대기 집이었고, 옆 동과 L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비둘기 소리였구나.'

애써 외면하며 집안일을 하고 라디오를 틀었다. 어떤 날은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릉그릉. 그 소리가 너무 신경 쓰였다. 나는 비둘기가 싫다. 눈알도, 깃털 색깔도('비둘기색'이라고 부르는 색깔도 싫다), 빨간 발도 싫고, 인도를 점유하며 뻔뻔하게 뒤뚱거리며 길을 막는 것도 싫다. 때문에 내가 인도를 걷지 못하고 차도로 빙 돌아 걸어가는 것도 싫다. 내 마음의 평화를 해치는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 불리는 것도 싫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뇌를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채우는 태교를 하고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던 시절에도 비둘기는 싫었다. 글로 적고 보니 나는 정말 비둘기를 싫어하는구나.


 일주일 넘게 들리는 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릴 같아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도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단다. 순간 들리는 그릉그릉.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남편이 베란다 문을 열었다. 나는 남편 옆에서 늘 비둘기 서너 마리가 옆 동 옥상에 쪼르륵 앉아서 그 소리를 낸다고 열심히 브리핑했다. 어라? 그런데 옆 동 옥상에 늘 있던 비둘기들이 안보였다. 그런데 계속 들리는 그릉그릉 소리. 나는 이제 헛것이 들리는 지경이 되었구나 싶었을 때, 남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우왁! 여기 있네! 여기 비둘기 있어!"

100미터 달리기를 20초에 달리며 운동신경이라곤 1도 없는 내가 순간 어떻게 그렇게 민첩하게 거실로 들어와 베란다 문을 잽싸게 닫았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발견한 비둘기는 우리 집 에어컨 실외기실에 있었다. 아참, 우리 집은 나랑 나이차이 별로 안나는 구축아파트였지. 정확히 말하자면 베란다 일부에 문을 달아 만든 공간(에어컨 실외기를 놓으면 꽉 찬다.)에 비둘기 한 마리가 있었다. 남편은 멀찌감치 서서 조금 더 살펴보더니 실외기실 문을 닫고 베란다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우리 부부는 둘 다 겁쟁이인데, 내가 엄청난 겁쟁이라서 남편이 용감한 겁쟁이 역할을 맡고 있다. 다시 실외기실 문을 열고 보아도 비둘기는 태연히 앉아있었고 이따금 그릉그릉 소리를 낼 뿐이었다. 엄청난 겁쟁이는 팔에 소름이 돋았고 머리는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용감한 겁쟁이도 이번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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