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내가 함께 성장하는 시간
작년 하반기를 느슨하게 살았다.
다람쥐처럼 열심히 다리를 구르며 보이지도 않는 발바닥에 땀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출산 후 처음으로 주어지는 휴가, 허나 육아는 쉼이 아니었다. 회사 대신 해야하는 또다른 (가정의) 업무랄까. 내 인생은 취업 전과 후로 나뉘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년생 두 딸을 얻고 나서야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평소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출산은 끔찍한 것이라 여겼던 사람이 바로 나다. 때문에 내 오랜 친구들은 내가 연년생 딸 둘을 키우는 것에 지금도 간간이 놀란다.
"네가 애 둘을?"
아이들은 감히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아이를 키우며 우울증 비슷한 것도 찾아올 정도로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성취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과 보람을 느낀다. 첫 번째 휴직은 똥기저귀와 분유로 점철된 힘겨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휴직기간 동안 생산적인 취미생활도 했다. 바로 미싱(재봉)이다. 손바느질이 태교로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데 나는 손바느질은 쥐약이다. 손바느질은 못하겠으니 그 비슷한 거라도 해야겠다 생각해서 동네에 있는 부라더미싱 대리점을 찾았다. 냄비받침, 앞치마, 주방장갑 따위를 만들며 입문코스를 마치고 첫 아이를 낳았다. 쉴 수 없는 워킹맘의 특성일까, 아이들이 커서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에 틈틈이 미싱으로 아이들 옷을 만들었다. 딸을 둔 엄마들의 특권은 단연 인형놀이라고 본다. 두 딸을 예쁘게 입히고 싶은데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사이즈만 다르게 두 벌씩 사자니 외벌이 가정에 사치다. 원단 1마를 사서 두 벌을 만들다가 3마를 사서 두 벌을 만들고, 4마가 필요하게 될 때쯤 복직했다. 복직할 무렵 돌아보니 공업용 미싱, 공업용 오버록, 원단산(원단이 많아 산을 이루면 봉틀러들은 '원단산'이라고 부른다.), 갖가지 부재료들과 수십개의 패턴과 책이 남아있었다. 아이들 옷부터 남편과 내 옷, 지인들에게 선물한 소품과 옷들까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많이 만들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면 좀 쉬었으면 좋았을 텐데 참 미련하게도 일했다. 어깨 구부려가며 재봉하고 아이들 밤잠 자면 새벽까지 허리 굽혀가며 재단했다. 아이들 코트와 한복을 만들정도로 실력이 쌓였다. 복직 후 재봉할 시간이 없어져서 어깨와 허리 통증, 시력저하를 남기고 모두 당근과 드림으로 처분했다.
두 번째 휴직을 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기저귀 시절보다 손이 덜 가지만 그 동안 손놨던 교육와 생활습관이 숙제로 주어졌다. 아이들도 자기 생각과 고집이 생긴터라, 아이들을 혼내기도 하고 화가 나서 못된 말이 나왔다. 차라리 똥기저귀가 나은 것 같다. 이번에도 휴직하자마자 도서관에 글쓰기 프로그램을 등록했다. 3달을 꾸준히 다니다가 마지막 한 주를 남기고 그만뒀다. 갑자기 번 아웃이 와서. 아이들을 돌보려고 휴직을 했는데, 또 나는 글을 쓴다고 노트북 앞에만 있고 아이들은 뒷전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 놨다. 브런치 접속도 안했다. 아이들에게 집중하니 더 화가 났다. 이 정도로 내가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구나. 그렇게 9개월을 보내고나니, 어느정도 틀이 잡혀갔다. 아이들은 당연하게 내가 내준 숙제를 하게 됐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이고(밥을 빨리 먹는 건 아직도 어렵다.), 원하는 학원에 데려다주는 가정주부 엄마로서의 역할이 자리잡혔다. 그렇게 작년 하반기를 느슨하게 살았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 나의 어떤 것을 찾아봐야겠다.
연말에 한 해를 돌아보고 반성하거나 새해에 계획을 세우며 희망에 벅차오르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냥 어쩐지 머릿속을 정리하며 글을 쓰고 싶었다. 어쩌면 그런 스타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