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은색의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오랜 추위는 아름다웠던 아스가르드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엇 하나 이전의 모습을 온전하게 지키고 있는 것은 없었다. 하나 같이 얼어붙고 서리와 눈에 뒤덮혔다. 세상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적막했고 대기는 차분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무거웠다. 헤임달은 아스가르드의 성벽 위에 홀로 서있었다. 그의 몸을 감싼 망토는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었고, 그의 황금빛 눈썹에도 얼음이 맺혔다. 그는 아무리 눈보라와 추위가 그를 감싼다고 해도 결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눈보라는 경계를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럴수록 헤임달은 더욱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한참동안 몰아치던 눈보라는 멈췄지만 한기는 더욱 강하게 몰려왔다.
헤임달은 문득 세월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형제를 잃고, 복수를 마친 뒤 지금까지. 헤임달도 이 세월이 얼마나 되는지는 세어본 적이 없다. 그저 살아오고 지나온 시간들이었다. 이런 표현이 맞을 만큼 헤임달에게 이 시간들은 무미건조했다. 신들은 여전히 아스가르드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았고, 거인들은 여전히 요툰헤임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 분명히 무언가 일이 있었다면, 있었을 테지만 헤임달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크게 위험한 일도 없었고, 크게 힘든 일도 없었다. 크게 기쁜 일도 없었고, 크게 행복한 일도 없었다. 발드르가 죽고, 신들의 황금기는 끝이 났다. 그렇다고 신들의 삶이 곧바로 끝나거나 '나락(那落 : 불교에서 지옥을 일컫는 단어 중 하나. 흔히 삶이 밑바닥에 처했을 때 사용하곤 함)'에 처박히지도 않았다. 신들은 그들의 삶을 그러저럭 이어갔다. 점점 그 빛이 힘을 잃고 희미해져갔지만 오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신들의 황금기는 곧 세상의 황금기 이기도 했다. 신들이 저물자, 세상도 저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인가부터 겨울이 점차 매서워지기 시작했고 추운날이 늘어갔다.
[하아.. 오늘따라 태양이 그립군.]
헤임달은 가만히 양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중얼거렸다. 하늘로 향한 그의 눈은 그리움으로 떨렸다. 하늘은 온통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혀 있다. 마치 니블헤임의 그것을 아스가르드로 옮겨다놓은 듯이 온통 쟂빛이었고, 어둡고 침울했다. 저 구름 뒤에 해와 달은 없다. 해와 달은 '극한의 겨울(핌불베트르/Fimbulvetr)'이 찾아온 다음,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극한의 추위가 몰려오는 가운데에도'솔(Sol : 태양, 태양의 마부)'과 '마니(Mani : 달, 달의 마부)'는 여전히 마차를 몰았다. 이것은 이들의 임무였고, 이들은 헤임달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해와 달이 마차를 몰때면, 언제나 두 마리의 늑대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두 마리의 늑대는 각각'스콜(Skoll : 소란스러운 자, 조소하는 자)'과 '하티(Hati : 미워하는 것. 파괴하는 것)'였다. 그들은 언제나 해와 달을 잡아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들이 왜 굳이 해와 달을 노리는 지는 알수 없다. 해와 달이 생긴 이래, 이 두 마리의 늑대는 늘 그들의 뒤를 따라 쉼없이 하늘을 뛰어다녔다. 그동안 해와 달이 이 두 마리의 늑대에게 잡히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해와 달은 늑대보다 빨랐으니까. 가끔 숨을 고르거나 혹은 장난으로 늑대의 입 언저리를 누비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삼켜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당시 북유럽 사람들은 일식이나 월식이 이렇게 태양과 달이 늑대의 입 언저리를 누비는 때라고 믿었다.) 그날은 생각도 하지 못하게 찾아왔다.
그 날도 매우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헤임달은 세찬 바람을 맞으며 아스가르드의 성벽 위에 서있었다. 그때 차가운 바람 사이로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묻어났다. 처음에는 그것이 바람소리이거나 요툰헤임 쪽에서 들리는 것이라 여겼지만, 곧 그것이 자신의 귀에 익숙한 늑대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임달은 황급히 망토의 두건을 벗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것은 늑대 스콜의 울음소리였다. 헤임달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헤임달은 순간 멈칫했다. 그는 이번에는 눈을 감고 더욱 소리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 바람소리가 작아지고, 그 사이로 들리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사이로 거칠게 달리는 마차의 바퀴소리가 들렸다. 마부의 숨소리는 매우 거칠었고, 공포에 젖어있었다. 이 숨소리는 분명 솔의 것이었다. 솔은 평소의 그 답지않게 연실 채찍을 휘두르며 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말들은 이미 한계에 다달아 있었다. 이 이상 말들을 몰아붙인다면, 말들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이다. 솔의 마차 뒤를 늑대 스콜이 쫒아 달리고 있었다. 그도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스콜은 전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콜의 입에서 쉴새없이 침이 흘러내렸는데, 그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달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솔은 마차의 속도를 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져갔다. 솔이 스콜과의 거리를 재기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스콜의 거대한 입이 솔은 물론 태양의 마차까지 한 입에 삼켜버렸다. 솔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늘의 구름 뒤에서 붉은 기운이 한차례 퍼져나가더니 쟂빛 구름이 검붉게 변했다. 땀에 젖은 헤임달의 손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헤임달은 스콜이 태양의 뜨거움으로 솔과 태양을 다시 뱉어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헤임달의 허무한 바람이었다.
그때 헤임달의 귀에 또 다른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놀란 헤임달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늑대의 울음소리와 함께 한 여인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은 달의 마차를 모는 달의 마부, 마니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검붉게 변한 하늘의 반대편으로 이번에는 푸른 기운이 한차례 퍼져나가더니 쟂빛 구름이 검푸르게 변했다. 사이좋은 오누이(전승에 따라 형제인 경우도 있음)는 죽는 순간도 그렇게 함께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헤임달이 할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로 올라가 두마리 늑대의 배를 갈라 솔과 마니를 꺼내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헤임달이 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헤임달은 이를 꽉 깨문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이후, 헤임달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별들마저도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하늘에서 태양과 달이 사라졌다. 이것은 늑대의 시대이다.
하늘에서 빛이 사라진 그날을 떠올리는 것은 헤임달에게 더없는 괴로움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성벽에서 홀로 경계를 서는 일이 다반사인 헤임달에게 태양과 달은 더없이 좋은 친구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아침이면 늘 먼저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던 솔. 밤이면 따뜻하고 은은한 빛으로 자신을 비춰주던 마니.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서 늘 재잘거리던 작은 별들. 그들 모두가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헤임달은 성벽 넘어 비프로스트를 바라보았다. 태양과 달이 사라진 지금, 그나마 빛을 품고 있는 것은 '비프로스트(Bifrost : 무지개 다리)'뿐이었다. 그런 비프로스트도 지금은 그 빛이 많이 바래버렸다. 헤임달은 손으로 가만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헤임달의 표정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이것은.. 그것의 징조일까.]
발두르의 죽음 이후, 아스가르드는 괴로움과 탄식으로 가득했다. 로키를 잡아 가두게 되면 달라질 것이라 여겼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미건조한 시간이 흐르더니, 갑자기 추위가 몰아쳤다. 아름답던 봄과 여름은 사라지고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만이 계속되었다. 아직 신들은 건재했지만 비프로스트 넘어 인간들은 이미 이전의 인간들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 부터 그들이 부르던 흥겨운 노래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