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펜소리 Mar 19. 2023

고무나무 키우기

작은 것부터 해보기

"당신이 그것을 잘할 수 있기 전까지 재미있는 것은 없다" 

 - 박세니 '초집중의 힘' 중



우리 집엔 세 식구 외에 살아있는 생명체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던 긴 흑역사가 있다.


시작은 신혼집이었는데, 당시 작은 베란다에 양가에서 주신 몇 가지의 화초들과 시장에서 산 모종도 심으며 취미로 화초 가꾸기에 빠졌었다. 정성이 부족한 건지, 실력이 없던 건지 한 계절이 끝나기도 전에 이별한 화초도 여럿 있었고, 일부는 다시 온 곳으로 돼 보내어진 것들도 있었다. 

행운목, 산세베리아, 스투키 그리고 이름 모를 선인장이며 몇 개의 이름난 난들도 우리 집에선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여름엔 썩고, 겨울엔 말라죽고, 식물 키우기 영 똥손인가 보다 했다. 

그나마 죽기 전에 발견된 중병이 든 애들은 관리 잘하시는 처가로 보내 지금도 쑥쑥 잘 자라고 있다. 


그 후 화초를 모두 정리하고, 좀 더 액티브 한 생물을 키우기로 하여 선택한 것이 열대어였다. 

물을 채워지면 혼자 들기도 버거운 어항을 사서 모래도 깔아주고, 인조 수생생물과 산소발생기, 여과기까지 설치해 주고 먹이도 좋은 것들만 로 준비했었다.

네온테트라, 엔젤피쉬 외 아기자기한 여러 종으로 화려하게 시작했으나, 왜 이렇게들 죽어나가는지...

그러다가 물고기와 노는 건 잠깐이고 주말이면 어항 청소하는 게 일이 되다 보니 몇 달이 지난 후엔 너무 귀찮아졌다. 그러다 보니 하는 거라곤 퇴근하고 죽은 사체를 치우는 게 일이 되었다.

키우기 쉽다는 구피,  그리고 금붕어로 전환하였으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금붕어가 끝까지 살아남았으나, 서로 먹고 먹히는 모습을 보면서 영 키우기가 불편해졌다.




물고기를 정리하고 키우기 시작한 건 차분하면서도 귀여웠던 거북이였다.

뭍으로 올라와서 일광욕을 즐길 수 있게 끔 아치형 다리며 백열등도 설치해 주고, 물도 소독약이 빠지게끔 며칠 전에 받아놓은 물로 갈아주고 했었다. 좀 큰 후로는 별식으로 모기며 파리도 잡아서 넣어주기도 했었다.   

거북이는 4년 정도 잘 키웠었는데, 뭐가 또 문제였는지 거북이가 안과를 가게 됐고, 일주일에 몇 번씩

눈에 안약을 넣어주는 지경이 되다 보니 이제 또 헤어질 날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퇴근해 보니 작별을 고했다.  


그즈음 소중한 생명을 이렇게 보내는 건 더 이상 못할 짓이라 생각하여 우리 가족은 앞으로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다시는 키우지 않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간 신경 쓸 일 없이 잘 지냈었는데, 발레발표회가 다시금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아내는 여자아이라 어릴 때 체형을 잡아줘야 한다고 발레를 시켰다. 그 덕분인지 몸도 유연하고 어깨도 말려있지 않고 잘 펴져있어 자세는 잘 잡힌 듯싶다.

이달에 진행되었던 발표회를 끝으로 6년간 배운 발레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크게 아쉬워하지 않아 다행이다. 


지난해 가을 발표회였던 거 같다. 

보통의 부모들처럼 꽃다발을 준비하면서 물어봤다. "어떤 꽃 받고 싶어?"

돌아온 대답은 "고무나무 받고 싶어"였다. 

어디서 들었는지 고무나무의 수액으로 지우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집에서 키우는 종으로는 그렇게 만들 수 없다고 잘 설명했지만, 그래도 고무나무 화분을 갖고 싶단다.

그래서 꽃다발이 아닌 고무나무를 준비했다. 


지난해 발표회 사진은 약 40cm쯤 되어 보이는 고무나무 뒤 화장을 짙게 한 발레리나 딸내미가 있다.

고무나무는 화분이라 무게가 있는 탓에 내가 뒤에서 받쳐 들어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좀 이상한 사진 한 컷이 나왔다. 

크게 신경 쓸 것 없이 2주마다 한 번씩 흠뻑 물만 주면 잘 자란다는 고무나무는 오랜만에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우리 집에 입성했다.   




지나가다 생각나면 가끔 씩 물만 줄 뿐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을 지닌 고무나무를 그렇게 방치되었다. 

 

요즘 여러 가지 생각이 좀 많았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경험해 보지 못한 것도 계획을 하고 있다.

그렇게 소파에 누워 요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거실 끝 처량하게 방치된 듯 살아있는 고무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불현듯 저것도 제대로 못 키우면서 무슨 새로운 시도를 하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현재의 모든 것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부끄럽고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성격상 이럴 땐 전환이 매우 빠르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새 수건을 하나 삶아서 한 잎 한 잎 잎사귀도 닦아주고, 물도 흠뻑 준 후 처진 가지도 끈으로 묶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불과 한 시간 전과 달리 처음 왔을 때처럼 생기가 도는 느낌도 든다. 


이번에는 좀 잘 키우고 싶다는 다짐을 한다.

햇볕도 쐬 주고, 종종 잎도 닦아주고 그리고 마트에 가면 영양제도 사다가 놔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는 진심인지 스케줄러에 2주에 한 번씩 물 주기 알람 설정도 해 놓고, 다이어리에도 기록해 놓았다.


집에 온 지 일 년 된 고무나무를 이제야 신경 쓴다는 아쉬운 가득한 생각은 접고, 그냥 잘 키워볼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녁 산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