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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guerite Aug 04. 2023

미친 척, 회사를 때려치웠다

의사였다가 회사원이었다가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의사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제법 잘해서 어쩌다 보니 흘러 흘러 이렇게 되었다.

한때는 충만한 사명감으로 눈을 빛내던 시절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나는 의사가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는다.

엉덩이가 깃털처럼 가벼운 데다 호기심도 많은데 그냥 머리가 조금 좋으니 공부를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인턴을 마치고 전공을 정해야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의대를 졸업하면 흰 가운 휘날리며 생명을 구하러 병원을 누비는 멋진 의사 선생님이 될 것 같지만, 실상은 며칠째 못 감아 떡진 머리에 반쯤 감긴 눈을 하고 기계적으로 차트를 쓰고 오더를 내리는 좀비가 된다. 그 상태로 집에 기어들어가면 샤워하고 잠깐 쓰러져 잤다가 일어나 공부를 해야 한다. 삼시세끼 엄마가 해 주는 밥에 후식까지 챙겨 먹으며 방에 들어앉아 고이 공부만 할 때도 힘들었는데, 도저히 이걸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의대생일 때의 환자에 대한 애틋함도 격무에 짓눌려 희미해졌고, 묘한 죄책감에 작은 불씨라도 되살려 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병원을 나와 회사로 들어갔다.


처음 해 보는 회사일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까마득한 교수님들과 최신 지견에 대한 논의를 하고, 점잖은 말투로 내부 관계자들과 회의를 하고 나오면 괜히 뿌듯하고 약간은 우쭐했다. 일이 익숙지 않으니 매일매일이 새롭고 신기해서 지루할 틈도 없었다. 게다가 병원에 다닐 때는 취미는커녕 예능프로 한 편 볼 시간도 없었는데 회사를 다니니 6시 이후부터는 자유였다. 동호회 활동도 하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칼질도 하며 행복했다. 시간이 없어 3년간 쉬었던 연애도 시작했다.


승진을 하고, 업무가 늘어나고, 경력이 쌓이고, 이직을 하고, 연봉을 올리며 8년 여가 흘렀다.

어느새 30대 후반이 된 나는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으면 신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어 대던 나의 자리에, 타성에 젖어 해야 할 일을 쳐내기나 하는 내가 앉아 있었다. 몸은 힘들지 않은데 괜히 고되게 느껴지고, 회사만 다녀오면 피로감과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다. 새로운 일을 벌여도 보고, 이직을 준비해 볼까 고민도 했다. 이게 번아웃인가, 싶다가도 대체 뭘 그리 힘들게 일했다고 10년도 안 되어 번아웃인가, 하고 자괴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반년을 갈팡질팡 하다 보니 어느 날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어중간하게 일하며 여러 모로 민폐나 끼치느니 깔끔하게 그만두고 쉬면서 고민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병원을 떠나는 것은 힘들었지만 회사를 떠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이걸 그만두면 평생 공부가 정말로 헛것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그만두었다.


평생 여건에 맞추어 흘러가듯 살아왔으니 더 나이 먹기 전에 딱 한 번만 제대로, 치열하게 고민해 보고 싶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진정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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