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못 그립니다. 그래도 가능합니다!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움직임을 부여할 그림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모든 경험은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작가의 원화를 움직이는 미디어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엔 내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이때의 경험은 어쩌다 보니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도움을 주게 됐다.
하지만 내 그림 실력은 공책에 낙서정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머릿속 상상의 세계를 그림으로 구현해 줄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작업이 전 과정에서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찾는 방법은 인터넷 검색, 인스타그램, 외주업체 등 다양한 경로가 있다.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해 보면서 내가 원하는 느낌과 가장 비슷한 작가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맘에 드는 작가님을 찾게 됐다!
함께 작업하게 된 분은 '새벽날개'(https://www.instagram.com/dawnwings1399/)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일러스트레이터였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일러스트레이터를 찾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생한 노력이 헛되지 않을 만큼 정말 좋은 분을 만나게 됐다. 굳이 의미부여를 해보자면, 김밥이가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 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 사비를 들여서 제작하는 작업이라 아쉽지만 머릿속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다 전달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다섯 컷 정도의 애니메이션을 위한 초안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정하게 됐다. 작가님께 그림을 의뢰드리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좋은 작가를 찾는 것만큼,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부분만 잘 전달이 된다면 원하는 결과물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서 아래의 기획안을 직접 그리게 됐다.
기획안 그림과 함께 아래와 같이 추가설명도 더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작업물이 너무 따스하게 마음을 울려서 작업 의뢰드리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작가님과의 작업을 통해 무지개다리를 건넌 '김밥'이라는 강아지에게 저만의 방법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총 다섯 컷을 의뢰드리는 사항입니다, 5컷 만화처럼 일러스트 다섯 컷이 이어지게 제작하고자 합니다. 일러스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첨부파일에 대략적인 생각을 그려서 보내드립니다.
1컷. 딩가딩가, 강아지 마을에서 동물 친구들과 함께 악기도 연주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유유자적 신나게 즐기고 있는 모습
2컷. 잠깐만! (김밥이 얼굴 확대)
3컷. 동그란 구멍으로 나와서 무지개를 타고 있는 김밥이의 모습 (배경을 어둡게, 은하수 같은 느낌을 우선 생각했습니다.)
4컷. 강아지가 누나랑 함께 신나게 달리는 모습(제공드린 레퍼런스 이미지를 참고해서 최대한 비슷한 무드로 부탁드립니다.)
5컷. 잠에서 깨서 방안 침대에 덩그러니 않아있는 밥이누나, 창가에는 아침해가 환하게 떴는데 해 안에 강아지가 웃고 있는 모습
비루한 그림실력과 어설픈 설명이었지만, 역시 프로는 아름다웠다. 위 그림은 나중에 엄청난 결과물로 돌아오게 된다. 작가님과는 실제로 만나 뵙지는 못하고 100%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며 작업을 하게 됐다. 기획안과 스토리라인을 구성하고 나서 내 상상 속에 있는 장면을 그림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작가님과 캐릭터를 만들고, 스케치를 그리고, 색을 덧입히면서 주책맞게 모니터 너머 혼자 많이 울기도 했다. 김밥이는 이미 떠난 지 2년이나 지났기에 이 모든 과정이 즐겁기만 할 줄 알았는데, 퇴근 후 감성이 차오르는 밤에 주로 작업을 해서 그런 걸까? 울기도 많이 운 것 같다. 다음 편에서는 오롯이 온라인으로 소통하면서 어떻게 김밥이 캐릭터가 나오게 되었는지 그 탄생과정에 대해 기록해보려 한다.
요즘 퇴근 후에는 루틴처럼 간단한 식사를 하고, 요가원에 갔다가, 나머지 시간은 씻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자기 전 누워서 한두 시간 정도 유튜브도 보고 딱히 인생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것들을 보는 시간은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극강의 집순이에다 뜨거운 햇살, 여름을 싫어하는 나는 주말에는 거의 90%의 확률로 집에 있다.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데, 평소에는 집에만 있다는 게 아이러니 같기도 하다. 특별한 약속이 있거나 아예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면 일상 중에는 거의 집에만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대체 넌 집에서 뭐를 하길래 그렇게 집에 있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놀랍게도 집에 있으면 나름 바쁘다.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TV 보기 등을 하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주말에도 역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다가 낮잠을 자기도 한다. 유튜브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을 가리지 않고 본다.
그러다 어느 날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긱블 https://www.youtube.com/@geekble 이라는 채널에서 '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그림'이라는 영상을 보다가 감명이 깊어서 채널에 들어가 보게 됐다. 여러 가지 신박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들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채널 소개글이었다.
'저희는 쓸모없는 작품만 만듭니다.'
밤바다 눈물을 훔치며 만들어 본 애니메이션, 미술관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일,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애쓰는 일까지. 생각해 보면 전부 유용하지는 않은 것 들이다. 하지만 너무도 당당하게 쓸모없는 작품만 만든다는, 쓸모 있는 물건은 이마트에서 찾으시는 게 좋다는 긱블의 채널소개를 보며 누가 볼지도 알 수도 없는, 파급력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나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 애니메이션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bob2nuna/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