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직장인의 회고
직장인으로 살아온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미술관에서 10년 차, 전 직장에서 만 1년 넘게 일한 것까지 합치면 어느덧 나도 프로 직장인이 된 셈이다. 어디서 들은 말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무하면 전문가라고 불러도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
10년여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다양한 감정을 겪었지만, 한 직장에서 10년이 되다 보니 요즘 느끼는 감정은 살짝의 무료함이 가장 큰 것 같다. 큰 불만은 없지만, 같은 장소를 오가다 보니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권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느끼는 순간순간의 짜증, 기쁨 같은 것들도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일로써는 그렇게까지 일희일비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했다. 직장생활은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내 자아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에, 누구에게나 힘든 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다 보니 내 주변에는 이직하지 않고 한 직장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친구들이 많은데, 사회 초년생 때와는 다르게 친구들을 만나면 직장자체는 더 이상 큰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들에게 직장은 안락한 가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 같은 것이었다. 물론 힘들다고 징징대는 순간은 여전히 반복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과 맞짱을 뜨기 위해선 직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친구들과 다르게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돈을 버는 이유를 대보자면 나를 위함이 가장 크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면서 ‘오늘도 나를 위해서 열심히 했다! 최고!’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퇴근길 차 안 막혔으면 좋겠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출근하기 싫다’ ‘배고프다’ 뭐 이런 1차원적인 생각들이다.
무료함도 일종의 기본 아이템이 된 지금.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일상 탈출을 위해 중간중간 여행을 가기고 하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을 보기도 하지만 그런 기쁨도 찰나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한때는 영화진흥위원회까지 찾아가서 영화를 볼 정도로 정말 많은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점점 생각할 여지가 있는 작품들은 그다지 찾지 않게 된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젠 호흡이 2시간 이상 되는 영화자체를 자주 보지 않는다. 1분 내로 끝나는 유튜브 쇼츠를 즐겨본지가 꽤 됐다. 그러다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마블시리즈 요약본 같은 것을 접하게 됐다.
아이언맨, 토르, 캡틴아메리카...... 돌이켜보니 시리즈 대부분이 본 것들이었다. 마블시리즈는 어찌 보면 입구와 출구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영화들이다. 슈퍼히어로들이 악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 하지만 캐릭터가 각기 다르기에 거기서 나오는 무궁무진한 매력이 인기를 끄는 요소인 것 같다. 슈퍼히어로들이 악당을 박살 내는 내용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토리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멋진 음악과 함께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면 또다시 현실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방구석에 누워서 영화를 방금 재미있게 본 내일 출근하기 싫어하는 나. 히어로 영화를 봤다한들 내 모습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내가 유치원생 정도였다면 ‘나도 슈퍼히어로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 뭐 이런 상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못하는 게 너무 많다. 유튜브 요약본을 통해 다시 만나본 슈퍼히어로들처럼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초능력은 당연히 없다. 캡틴아메리카와 같이 강인한 정신력과 피지컬이 있지도 않다. 이런 대단한 것들을 배제했을 때도 너무 평범한 것 같다. 드라마로 따지자면 현재 내 상태는 지나가는 행인 1 역할에 어울리는 포지션이랄까? 딱히 거슬리는 것은 없지만 그다지 존재감도 없는 상태. 거창하게 갈 것도 없다. 당장 내일 휴가를 쓰고 집에서 놀고 싶은데 휴가도 다 소진해서 당분간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다. 이런 나는 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어려워서, 사실 지금도 완벽한 답을 찾을 것은 아니라서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한 작은 답을 이 긴 글을 읽어주시는 ‘행인 1’ 분들과 나누고 싶다. 나는 슈퍼히어로는 아니지만, 아침에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넬 수 있다. 쇼핑을 하러 갔다가 나와 같은 순간에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모르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줄 수 있다. 돈이 많지 않지만 주변사람들에게 커피 한잔을 살 수 있다. 친구들의 생일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지만 카카오톡 알림 덕분에 간단한 기프티콘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길거리에 술에 취해 쓰러진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쫄보라서 말을 걸 수는 없지만, 문자신고로 경찰에 알려서 집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유튜브 영상을 만들 수는 없지만 좋은 콘텐츠가 있으면 좋아요를 누를 수 있다.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올 때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넬 수 있다. 그 밖에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맙다’고 표현할 수 도 있고, 자잘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는 것도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들이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빛나거나 어디다가 내세울 수는 없는 것들이다. 이런 자잘한 이야기로는 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별거 아니게 느껴지고, 무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나름대로 ‘나만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들을 하고 있다. 딱히 파급력이 없는 행인 1 비중의 역할이어서 어디다 자랑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주변사람들에게 ‘그 영화에 내가 행인으로 나왔으니 한번 찾아봐!’라고 말할 수는 있는 정도랄까.
30대 김 씨는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의 문들 열고 들어간다. 내 뒤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따라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습관적으로 문을 잡고 몇 초를 기다린다. 오늘따라 그 모르는 분께서 방긋 웃어주셨다. 별일도 아닌 건데, 세상은 딱히 바꿀 수가 없고 슈퍼히어로는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 미소를 보니 기분이 꽤 괜찮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