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셋의 플레이데이트
딸 가진 엄마들은 아이의 친구관계에 예민하고 미세한 감정변화에 힘들어할 것이다. 나의 최대 관심사도 딸이 친구들과 얼마나 잘 지내는가인데 5세에게 매번 물어보는 것도 어렵고 또 모든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어 딸의 기분과 표정을 살피는 것으로 대신한다. 아침엔 유치원 가기 싫다는 말 없이 즐겁게 집 밖을 나서는지, 키즈노트(procare)에 올라오는 사진 속 표정은 어떤지, 하원할 때 보이는 친구들과의 어울리는 모습.. 그냥 잘 지내나 확인하는 정도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두근두근 조이듯이 불안하고 조바심이 든다. 미국에 와서 낯선 언어와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있는 환경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걱정이 컸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한국 어린이집 생활에서부터 그랬다..
아파트 단지의 한 어린이집을 보냈는데 같은 반 5명 중 3명은 남자아이, 2명이 여자아이였다. 딸은 같은 반 한 명 있었던 여자 친구를 참 좋아했는데 그 친구는 낮잠 자는 것을 힘들어해서 12시면 엄마가 하원을 시켰다. 여자친구가 없는 오후시간은 심심했는지 "엄마 난 오후에 친구가 없어, 승제 지한이는 나랑 안 놀아.. 난 기차놀이 하기 싫어" 라며 슬픈 표정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3세 아기가 하는 말에 그랬구나~ 심심해서 어쩌니~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이런 한마디에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여리고 여린 우리 아이가 이제 벌써 친구관계에서 상처받기 시작하는구나’라며 오버싱킹과 호들갑을 시작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어쩔 수 없지 뭐, 혼자 노는 법도 배워야지" 큰 일 아닌 듯 넘어가는데 나는 아이의 친구문제에 있어서 유독 예민하고 힘들다.
2주 전 즈음 유치원 같은 반 엄마에게 우리 딸 Aria와 Nah, Risha가 친하니 셋이 한번 플레이 데이트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문자가 왔다. 딸도 저 두 명의 친구를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터라 먼저 플레이데이트를 제안해 준 게 좋았고 토요일 4시 Park에서 만나기로 했다. 딸은 아침부터 친구들 만나러 갈 시간만을 기다리며 들떴고 신난 딸을 보며 나도 덩달아 흐뭇했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딸은 먼저 와있는 Nah라는 친구에게 반갑게 뛰어갔는데 그 친구는 딸을 본체만체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계속 혼자 노는 것이 아닌가. Nah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어색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고 딸도 그냥 놀이터에서 혼자 오르고 내리며 놀기 시작했다. 하지만 Risha라는 친구가 왔을 때는 우리 딸이 왔을 때와는 달리 소리를 지르며 반겼고 그 둘은 바로 같이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상함을 감지한 순간 딸의 얼굴을 봤더니 역시나 굳어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친구들한테 한번 가볼까?' 말했고 딸은 주볏주볏 다가가려 했지만 너무나 신나게 놀고 있는 두 명 사이에 쉽게 끼지 못했다. 부러운 듯이 멀찍이 바라보기만 하다 딸은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들과 친구들이 한 번씩 와서 괜찮냐, 무슨 일이냐, 같이 놀자 한 마디씩 건네고 가긴 했지만 딸은 이미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속상한 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나도 옆에서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엄마니까... 빠르게 마음을 잡고, 조금 쉬다 같이 놀 마음이 들 때 이야기해 달라고 말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딸은 무언가 결심한 듯이 '엄마 나 놀 수 있겠어' 단단하게 말하며 비장한 표정과 함께 빛의 속도로 친구들에게 뛰어가더니 오히려 큰 소리로 장난치며 둘 사이로 훅 들어가 놀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친구들에게 달려간 딸의 모습에 어벙벙하고 있을 때 친구엄마들이 나를 불렀고 국적은 다 달랐지만 이런저런 육아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통 딸이 뛰어가는 아니 돌진하는 모습만이 계속 반복되며 맴돌고 있었는데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저렇게 빨리 달려야지만 친구들 사이에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친구 엄마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나의 눈과 온 신경은 딸에게 향했고 그 모습이 티가 났는지 엄마들은 '이제 잘 노네요~ 처음이라 그랬나 봐요'라고 했다. 사실 즐겁게 잘 놀긴 했지만 여자 세 명이 모였기에 어쩔 수 없이 두 명과 한 명이 갈리는 현상이 돌아가며 반복되었고 각자 마음대로 안될 때마다 아이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딸은 주도성과 놀이를 통제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지라 자신의 페이스로 계속 놀이를 끌고 오려는 모습이 보였고 상황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잠깐씩 홀로 서있는 모습도 보였다. 평소 ‘오늘 학교 어땠어?’라는 물음에 딸은 ‘친구랑 놀다가 혼자 있다가 다시 또 friend가 생겨서 놀았어’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이 말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심난한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헤어질 때 아쉬워서 더 놀고 싶다며 안 간다고 떼를 썼고 엄마들이 힘겹게 데리고 갔다. 친구들이 다 떠난 후 나는 딸의 마음이 알고 싶어 놀이터에서 좀 더 놀아준 후 공원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했다.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아니"
"재밌게 놀던데 왜~ 아까 처음에 Nah가 안 반겨줘서 그랬어?"
"응 Nah 미워. 나도 Risha가 좋고 Risha랑만 놀고 싶은데 Risha는 계속 Nah랑만 놀아"
역시나.. 속상했구나..
만약 노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정말 친구들과 사이가 안 좋게만 있다 왔나 싶었을 것이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3~4번 정도의 삐졌던 상황만을 콕 집어 얘기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딸의 감정을 풀어주고 싶어 나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엄마도 그런 적이 있었어.. 너무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었는데 항상 그 옆에는 소이라는 다른 친구가 있었어. 셋이 같이 놀아도 좋았을 테지만 엄마는 소이랑은 왠지 친구가 되기 어려웠고, 엄마가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친구는 엄마보다 소이를 더 좋아했어.. 엄마도 그때 참 속상했었어.
공감의 힘은 큰 건지 딸은 눈빛을 반짝거리며 나의 얘기에 관심을 보였고 폭풍질문을 쏟아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친구이름은 뭐였어? 왜 친해지고 싶었어? 지금은 친해? 그 친구는 왜 나빠? 엄마는 그래서 어떻게 했어? 등등..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친구관계가 좋았던 편이지만 4~6명 정도의 친했던 그룹 내에서 누가 누구랑 더 친하고 오늘은 누구누구랑 놀지 말자 같은 유치한 신경전에 에너지 소모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힘들면 멀어지는 것도 괜찮다는 것과 마음 맞는 친구와만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도 된다는 것을 터득한 후 피곤한 관계에서 빠져나와 편안해질 수 있었다. 사실 여자아이들의 관계에 더 예민해진 이유는 여동생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얗고 오밀조밀 예쁘고 이효리 같은 반달 눈웃음을 가진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가만히 있어도 여우 같다는 오해와 여자친구들의 샘을 많이 받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방마다 피아노를 두고 엄마가 피아노레슨을 하셨기에 같은 학교 친구들이 집으로 많이 왔는데 하루는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내 여동생이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엄마는 매우 놀라셨고 나도 감히 누가 내 동생을 괴롭히고 따돌린다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동생의 이미지가 문제였는지 성격이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은 끊이지 않고 친구들과 트러블이 있었고 같은 초, 중, 고를 다녔던 나는 동생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직접 뭐라고 한 적도 있고, 덩치 큰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누가 너 괴롭히는 애 없지? 내 동생 괴롭히는 애 있으면 가만 안 둔다" 라며 일부로 크게 소리치기도 했다. 지금생각하면 유치하지만 어렸을 땐 윗학년 언니들이 젤 무서운 시절이라 이 방법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고 동생은 지금까지도 '언니는 나의 은인이야, 언니 없었으면 난 학교 못 다녔을 거야' 라며 영웅담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내가 친구와 사이가 안 좋을 때는 뭐 다시 좋아지겠지 하며 잘 견디는 편이었지만 동생이 힘들어할 때면 잠도 못 자고 마음 졸이며 걱정했었다. 학창 시절 내내 동생이 잘 지내는지 친구관계는 어떤지 살폈고 지금까지도 회사에서 힘들게 하는 동료는 없는지 묻고 있는 언니가 되었다.
공원에서 한참을 딸과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작 5세인데 꼭 15살 딸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주차장으로 걸으며 'Aria,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했더니 손으로 뜯어먹었던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한다. 그날 저녁 우리는 산호세 또봉이치킨에서 옛날통닭과 소떡소떡을 시켜 먹었고 친구와 스트레스 풀듯 닭다리를 하나씩 들고 먹다 보니 어느새 꿀꿀해진 기분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엄마의 말연습'이라는 책을 읽었다. 한 챕터에는 친구관계에서 어떻게 엄마가 대응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고 아이를 걱정하기 앞서 나의 감정을 먼저 해체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 깊었던 몇 문장을 남겨 본다.
- 아이의 친구 문제가 힘들게 느껴지는 까닭은 엄마의 감정을 건들기 때문이에요. '너도 그런 애랑 놀지 마' '상대하지 마'라고 말하게 되는 것도 엄마의 감정이 이입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모가 먼저 상처를 받으면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없습니다. 친구문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가 필요해요
- 상처받고 시행착오를 경험해야 내게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당장은 지켜보는 부모님의 마음이 아프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면이 부쩍 성장한 아이를 만날 수 있게 될 겁니다.
윤지영 님의 '엄마의 말연습' 중
사실 아이의 인간관계를 엄마인 내가 다 조절해 줄 수 없기에 딸이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성장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플레이데이트 이후 유치원에서 올려주는 사진을 더 유심히 보는데 그날 사이가 안 좋았던 Nah라는 친구와 찰싹 붙어 환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집에 와서는 'Nah가 나랑 노는척하면서 안 놀고 Best friend도 안 하고 속상했어'라고 말한다. 며칠 전 지인분과 그 아들, 나와 Aria 넷이 짬짜면을 먹으러 갔는데 딸은 좋았는지 신나서 이것저것 말을 많이 했고 학교생활 이야기를 하다 'Lia와 Myra는 오늘 나를 안 좋아해서 나랑 안 놀았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평상시처럼 ‘어머.. 우리 딸 슬펐겠다'라고 반응했는데 앞에 계시던 분은 ‘그게 왜 슬퍼~~ 그럴 수도 있는 거지~'라고 하셨고 딸은 '맞아 엄마. 그게 왜 슬퍼? 하나도 슬픈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아.. 나도 모르게 내 감정과 시선을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슬프거나 화나는 혹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감정의 진짜 이름, 실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를 더 잘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도 단단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 계속 파고들고 다듬다 보면 언젠가 편안해진 내가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