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도 계좌에도 당당함과 주도성이 필요하다
돈이나 물건에서 꼭 내 것 이어야 한다는 소유욕이 적은 편이다. 아니 갖고 싶은 물건은 많지만 내 것을 가족과 함께 공유하는 것은 괜찮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겠다. 어렸을 때 아끼던 인형이나 머리핀을 동생이 몰래 방으로 가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동생 거가 내 거지.. 우리 집에 있는 건데 하는 생각으로 다투기보단 그냥 넘기는 적이 많았다. (하지만 동생은 악착같이 자기 것을 챙겼다) 성인이 된 후에도 돈을 모으고 모아 갖고 싶은 가방이나 액세서리를 샀을 때 같이 쓰면 더 좋지 라는 생각으로 엄마나 동생에게 주곤 했다. 결혼 후에는 내 월급통장을 남편과 공유했다.
결혼했을 당시 남편은 학생이었고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혹시나 수입이 없는 남편이 생활비로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을까 괜한 염려에 돈관리는 더 꼼꼼한 사람이 하는 게 맞다며 월급날이면 남편통장으로 월급을 몽땅 이체했다. 남편은 나의 예상처럼 알뜰하게 관리비, 보험비, 생활비, 저축등을 나누어 관리를 했고, 신혼 초의 이런 시스템이 자연스레 자리 잡혀 남편이 취업을 한 뒤로도 돈관리는 표면적으로는 함께였지만 남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점점 나는 우리의 돈이 어떻게 흘러가고 얼마나 모아지는지 신경 쓰지 않았고 신용카드 한 장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남편은 한 달에 한번 엑셀에 정리를 해서 브리핑을 해주었지만 다음날이면 기억이 나지 않았고, 편하게 돈을 쓰는 나에게 관리하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한 번씩 남편과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모을 수 있을지 또는 생활비 관리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며 나도 돈관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보려 한적도 여러 번이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남편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며 철없는 본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사실 결혼하면 남편과 돈관리를 투명하게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어렸을 때부터였는데 부모님의 경제관리시스템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월급의 일부를 어머니께 생활비로 주셨고 나머지 투자 및 재테크는 아빠가 도맡아서 하셨다. 엄마돈, 아빠돈 각자 관리 시스템으로 어렸을 때부터 "얼마 빌려줬던 거 있잖아" "그건 당신 돈으로 해야지"식의 엄마아빠 대화를 종종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린 한 가족인데 왜 돈을 서로 빌리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분리된 돈관리 시스템이 문제를 나타낸 건 아빠의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도 한참 후였다. 나의 학창 시절엔 아빠도 잘 나가던 시기였다. 부모님께서는 나와 동생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켜 주시겠다는 마음으로 강남으로 이사해 대치동에서 학원에 과외까지 정말 부족한 것 없는.. 아니 넘치는 교육을 시켜주셨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들어가고 20대를 즐기고 있을 즈음 아빠의 수입은 점점 예전 같지 않으셨고 한창 공부할 나이인 동생이 있었던 우리 집의 소비규모는 줄지 않았다. 하나둘씩 생기는 작은 구멍을 아빠 혼자 메우려 노력하시다 구멍은 커져버렸고 상황이 나빠진 다음에야 우리 집의 경제문제를 알게 되었다. 상황이 악화될 때까지 엄마는 무엇이 문제인지, 자금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하셨고 그냥 아빠만 믿고 계셨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가 좀 더 일찍 경제상황을 오픈하셨다면.. 아니 엄마와 아빠가 가정경제를 의논하고 투자든 소비든 함께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면 무조건 남편과 서로 오픈하고 함께하는 가정경제를 꾸리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신혼 초 나의 월급을 남편에게 주어도, 비상금 같은 건 없이 계좌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오히려 행복했다.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남편도 먼저 월급과 돈을 어떻게 모으고 있는지 오픈해 줬다. (꼼수 없이 투명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남편과 의논하며 소비하고 계획하는 게 좋았고, 가끔 연말 보너스로 큰돈이 들어오거나 적금으로 모아진 돈을 투자 목적으로 남편 계좌로 옮겨놓느라 나의 계좌 잔액은 적어지더라도 괜찮았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남편에 대한 신뢰이고 두 번째는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당당함이었던 것 같다. 다시 월급으로 채워질 거고 한 달 한 달 지나면 보너스는 또 들어오니까.. 소비를 하는 데 있어서도 당당했고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휴직을 하고 미국에 오면서부터 내 맘대로 신용카드를 쓸 수도 없고 철저하게 남편이 월급에서 주는 일부의 생활비로만 써야 했다. 미국 온 초반에는 남편이 없으면 어디 운전해서 나갈 수도 없었고 카드로 결제를 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회사를 출근하는 날이면 현금을 올려두고 갔는데 타지에서 그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도 했고 남편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주눅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돈이라는 것보다도 둘째를 출산하고 해외이사준비부터 서류준비, 한국 집정리, 남은 짐 보관이사까지 전반적으로 버겁고 피곤해진 상태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예민해지고 힘들었던 건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말이 많지 않고 일처리를 도맡아 하던 남편은 나에게 같이 좀 하자, 도와달라는 얘기를 많이 했고 끝에는 '너 정말 일 안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신생아 육아로 잠도 잘 못 자는 나한테 이런 지시까지 해야 하나 기분이 나빴고 내가 못했을 땐 직장상사의 질책을 받는 것 같은 자격지심이 들었다. 예전처럼 돈도 안 벌고 집에 있으면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 당시 나는 사소한 하나하나가 슬펐다.
미국에 집을 구하고 안정이 된 후 드디어 내 계좌를 개설하러 Bank of America에 가던 날 이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직장도 신용도 없어서 내 계좌를 만들면 일정금액의 Deposit과 계좌유지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은행에서는 남편 계좌에 나를 Joint 하는 방법을 권했다. 어차피 나는 미국에 길게 있을 것도 아니고 남편계좌에 들어가 있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는데 어떤 마음이었는지 No라고 외치며 나는 나의 계좌를 원한다고 말했다. 계좌를 개설하고 집에 돌아와서 차분히 다시 생각을 하니 고환율에 한 푼을 아껴야 하는 상황에 괜한 객기를 부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편과 이야기를 하여 내 명의의 계좌는 유지하되 내 계좌에 남편을 Joint 시키고 남편월급의 일정 부분을 내 계좌로 입금받도록 하여 계좌유지비와 Deposit은 유지하지 않아도 되도록 변경했다. 계좌를 만들었긴 하였으나 내 계좌에 남편명의가 들어온... 그냥 표면적으로 자존심만 살짝 내세워진 듯한 상황이 되었다. 신용카드 발급 시에도 나에겐 미국에서 증명해 보일 신용이라는 게 없어 신용이 쌓일 때까지 카드의 한도와 Deposit을 설정해야 한다는 사실도 나의 현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직장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No라고 답할 땐 한국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고 다시 돌아갈 건데 뭐 괜찮아..라고 생각했지만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영어를 못해서 더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만약에 다 내려놓고 남편만을 바라보고 이주한 상태였다면 이 허한 마음이 어느 정도 일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난 퇴사하고 싶다 노래를 불렀었는데 사실은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힘이었다.
얼마 전 부부싸움을 했다. 정말 사소한 일로 다툼이 시작되었는데 싸우다 보니 사건이 아닌 남편의 태도가 날 화나게 했다. 평상시에도 하루쯤 혼자 호텔에서 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이날은 정말 내가 나가야겠다 싶었다. 씩씩대며 집 근처 호텔을 알아보고 예약을 하는데 남편돈으로는 예약하고 싶지가 않아 한국 내 신용카드로 결제를 했다. 남편이 카드내역서를 일일이 보는 것도 아닌데 내 계좌에 있는 돈을 써야만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남편이 싫어할만한 개인적인 소비를 한다거나 친정 부모님에게 돈을 써야 할 때 생활비가 있더라도 굳이 내 계좌의 '내 돈'으로 했던 것 같다. 이럴 때 비상금이라는 게 필요한 거구나.. 비상금이 나쁜 것만은 아니네? 생각이 들며 너무 투명하게 모든 걸 오픈했나 싶은 적도 있었다. 남편돈이 내 돈, 내 돈이 남편돈 우리 가족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했으면서 사실은 비빌언덕은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이만큼 가정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 자존심도 내세우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혼 후 쭉 돈관리를 같이 하고 싶다고 했으나 나는 여태 남편에게 그냥 맡겨두고 무책임하게 편하게만 살았다. 관리비는 얼마가 빠져나가는지 보험은 어느 계좌에서 얼마가 나가는지 저축은 얼마가 되고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른다. 남편도 완벽하지 않기에 가끔씩 허점이 보였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함께한다면 더 탄탄한 재정과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란 걸 알고 있다. 딸아이에게는 그렇게 자기'주도'학습을 강조하면서 나는 왜 내 계좌 하나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있나 반성하게 되었다. 돈돈 거리면 속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쿨하게 사는 모습에 은근히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나는 내 마음에 귀 기울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일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해서 살아가는 한 발을 내디뎌야 하는 지금, 나의 계좌도 같이 딱 붙들어봐야겠다.
주도성 있게 돈을 관리하는 것,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 않는 것, 재미없다고 생각한 경제에도 관심을 좀 가져보는 것 나의 새로운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