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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Mar 08. 2023

빠삐코는 죄가 없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압니다


성장기 아이들에겐 '일일 쌈박질 권장량'이라도 있는 걸까.  


'일일 칼로리 권장량', '일일 비타민C 권장량' 뭐 이런 것처럼 말이다. 우리 집 파이팅 넘치는 자매님들을 보고 있다 보면 하루에 꼭 필요한 쌈박질 권장량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분들은 꼭 이 권장량을 채워야 쑥쑥 키가 크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매일 매일 꼬박꼬박 싸운다.

어쩌다 얼떨결에 사이가 너무 좋기만 했던 날은 자기 직전에라도 서둘러 꼭 한판을 하고 주무신다.  남편은 그렇게 징하게 싸울 거면 한 5미터쯤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쿨하게 지내라고 권한다.  


하지만 역시나 고개만 돌리면 샴쌍둥이처럼 붙어서 뭔가를 하고 있다. 그 뭔가가 싸움일 때가 많고 말이다.




오늘은 '빠삐코 전쟁'이다. 빠삐코를 입에 물고 있는 동생 vs 아이스크림 대신 불만만 잔뜩 물고 있는 언니의 성난 대화가 시작된다.


"너 진짜 장난 없다"

"내가 뭘?"

"아니, 넌 어떻게 니 것만 딱 갖고 오냐"

"언니도 먹을 거였어? 몰랐지"


그렇게 말싸움 스타트. 하나도 안 재밌는 싸움 구경에 지쳐갈 때쯤

난 '인간적으로 그만들 좀 햇!!' 샤우팅을 날릴 참이었다.


"넌 맨날 그러더라. 나는 맨~날 지 꺼 챙겨주는데 지는 지 꺼만 쏙~"

"아니 그럼 내가 '빠삐코 먹어야지~'하고 뛰어갈 때 얘길 하던가"

"하~ 야 그걸 말로 해야 아냐?

한번 물어봐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넌 맨날 그래"


가만. 이 익숙한 느낌은 무엇이지. 너무 익숙해서 귀에 착착 감기는 이 대화체.  '자다가 뺨 맞고 황당해하는 사람'과' 어떻게 그걸 모르냐고 답답해 속 터져 죽는 사람'의 대화.


그건 바로 우리 부부의 대화였다. 대화를 듣다 첫째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이 된 나는 하마터면 둘째에게 한마디 날릴 뻔했다.




신혼 초, 아니 연애 때부터였다. 우리의 싸움에는 꼭 이런 대화가 등장했다.

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아니, 말 안 하는데 그걸 무슨 수로 알아?


'주는 거에 익숙하고 눈치껏 행동하는 게 몸에 밴 K장녀', 반대로 '받는 거에 익숙하고 눈치볼 일 없이 자란 막내아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으면 이렇게 이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애초에 마음이 없는 거지'  나는 마음=행동이라고 부르짖으며, 말 안 해도 알아서 해 주길 바라고만 있었다.  


반대로 남편은 마음이 꼭 행동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 라며, 그렇게 서운한 걸 쌓아두지 말고 그때 그때 얘기해 달라 했다. 자기가 해 줬으면 하는 걸 콕콕 찍어서 하나하나.





남편 말대로 해보려고 했다. 쉽지 않았다. 자꾸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옆구리 찔러서 절이라는 걸 받아야 되나 싶었다. '에이, 안 받고 만다 내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운한 감정은 쌓이고 쌓여 별 거 아닌 일에 화풀이를 해댔다. 꽁한 건 따로 있는데 엄한 걸 갖고 자꾸 트집 잡고 있자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까짓 껏 다시 해 보기로 했다. 차마 내 입으로 얘기하기 민망하고 어색한 얘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나 오늘 좀 힘드네. 설거지 좀 부탁해"

"나 이번 생일엔 썬글라스 하나 갖고 싶네"

"명절 내내 고생했으니집에 가는 길에 드라이브 쓰루 한번 찍고 갑시다"


이렇게 작은따옴표에만 있던 말을 큰 따옴표로 옮겨 놓으니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엎드려 받는 절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절 할 생각도 않는다고 입이 댓 발 나와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누군가한테 부탁하는 걸 원체 힘들어하는 사람이라 아직도 '에라 모르겠다' 민망함을 꾹 눌러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남편은 얘기하면 행동했다. 하지만 말한 것 그 이상은 절대 불가다. 또, 늘 리셋하는 마음으로 한번 했던 말도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인내심을 갖고 콕콕 집어서 얘기해줘야 한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내가 말한 건 '했다'. 선뜻 내키지 않은 얼굴일 때도 있었지만 좌우지간 '했다'.

그동안 말 안 해도 알아줘야 그게 진짜 마음이지 하고 살아왔지만

말한 걸 해 주는 것도 '잠자고 있던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빠삐코가 먹고 싶을 땐

빠삐코가 미치도록 먹고 싶다고

어서 빨리 가져다 달라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척 보면 압니다' 같이 아름다운 일은 잘 없다.

까놓고, 그걸 꼭 말로 해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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