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좋아한다.
'커피'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기분이 들뜨는 것처럼
'산책'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벌써 몇 그램 쯤 가벼워진다.
그냥 생각 없이 왼발 오른발 번갈아 내딛는 것뿐인데
그 단순한 동작이 사람 마음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건 매번 놀랍다.
기분이 좋을 때도 걷지만 속 시끄러울 때는 더 걷는다.
그렇게 걷고 돌아오는 길엔 시끄러웠던 속이 어느새 잔잔해져 있다.
그중에서도 동네 걷기를 특히 좋아한다.
만화 '우연한 산보'의 주인공은
이상적인 산책이란 '태평한 미아가 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자칭 산책 천재라는 그의 말대로 동네 산책에선 스몰 마인드인 나도 샛길로 새는 데 적극적이 된다.
어제 안 가본 길로 간다고 해서 큰 일 날 거 없고, 또 잠깐 헤매다 어찌어찌 돌아 나오면 결국 익숙한 길일 걸 아니까.
익숙한 커피가 좋고
익숙한 사람이 좋은 나도
그 잠깐의 어리둥절은 마음에 든다.
어디 멀리 놀러 가서 걷는 것도 물론 매력적이다. 새로운 풍경을 보면 맥박수가 달라지니까.
하지만 좋~다 하는 그 순간, 이상하게 조바심이 슬그머니 끼어들곤 한다. 그 좋은 걸 눈으로 꾹꾹 눌러 담아야 될 거 같은 조급한 마음이. 그곳이 다시 못 올 관광지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동네 산책에서 조바심은 일단 off다.
낯선 관광지를 걷는 게, 숙소에다 긴 줄을 묶어 놓고 구경하는 느낌이라면
동네 걷기는 줄을 끌러 놓고 다니는 편안함이 있다.
가을방학의 이 노래가사처럼.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가을방학 '속아도 꿈결'
언젠가 경주에 놀러 갔다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유명 관광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어떨까. 슬리퍼 찍찍 끌고 걷다 보면 마트 대신 첨성대가 보이고
소화 좀 시킬 겸 해서 츄리닝 바람으로 걷다 보면 안압지가 나온다 그럼 어떨까. 그런 천연 소화제 같은 풍경을 코 앞에 두고 산다면. 상상은 잘 안 가지만 이건 확실하다.
이방인인 나만큼 설레진 않겠구나.
그래서 관장지 매표소엔 '지역민 할인'이란 게 붙어있는지 모르겠다. 설레지 않는 만큼 딱 그만큼 깎아주는 걸지도.
지역민 100% 할인된 기분 좋은 가격으로 우리 동네를 돌아본다.
관광책자에 나올 만한 곳 하나 없는, 특별할 거 하나 없는 동네를.
겨울 시즌 한정 판매라더니 사거리 붕어빵 아저씨 '피자 붕어빵' 판매종료됐네. 1년을 어찌 기다리나.
요구르트 사장님 전동차도 봄이다. 바람막이 비닐 코트 다 벗고.
새로 생긴 치킨집 카피 한번 기가 막히게 뽑았네. '미치고 팔닭 뛸 맛'이라니.
종이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사람과 몇 발짝 떨어져서 상반신만 기울이고 들여다보는 사람.
당근 거래의 현장이군.
'파워워킹' 아니고 '어슬렁 워킹'이라 가능한 구경이다.
당근 거래 품목이 몹시 궁금하지만 걷기의 리듬을 깨지 않기 위해 계속 걷는다.
그렇게 오지랖 넓은 전지적 주민 시점으로 걷다가 잠시 멈춰 선다. 얼마 전 물리치료쌤의 당부가 생각 나서다. 수시로 하늘 보라는 당부.
생각난 김에 목디스크 치료용 하늘보기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안 쓰던 근육을 늘려주며 하늘을 보다보면
이런 장면이 얻어걸리기도 한다.
비행기가 그려놓고 간 손톱달 모양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