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해가 쨍쨍한 한낮의 길바닥에는 어김없이 보이는 것이 있다. 아니길 바라며 들여다본다. 역시 바짝 마른 지렁이의 사체다. 바로 지척에 화단이 있는데 말이다. 발로 살짝 밀어 화단 쪽으로 붙여둔다. 아이가 어릴 때는 가지고 다니던 물병의 물을 부어 흙으로 돌려보내주었다. 사람의 한세대는 대략 30년, 초파리의 한세대는 12일, 지렁이의 한세대는 3,4년. 이 지렁이는 한세대의 역할을 다하고 수명을 다한 것일까. 조금만 몸을 돌려 움직였다면 말라죽지 않고 흙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지렁이도, 나도.
아이와 생태공원을 자주 갔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놀러 가기도 했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곳들과 멀어졌다. 한 줌의 흙이나 작은 벌레와도 사랑스럽게 조우하던 어여쁜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사람의 손으로 잘 가꾸어 놓은 듯한 생태공원의 숲 길을 걸으며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 어떤, 병충해나 자연재해로 숲이 망가져도 인위적인 치료나 대책을 전혀 하지 않는다.''시간이 걸려도 자연의 회복능력으로 되살아 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다'라고 했다. 그 말이 잊히지 않고 늘 기억에 남았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부터 제시하고 '완벽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과학 교과서 앞장에서 읽은 글에 알 수 없는 깊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아이도 책에 줄을 그으며 함께 글을 되풀이해서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의 과학교과서중 한 페이지
일 년 전 이 글은 생태계의 모습을 몰래 확인한 듯한 신비한 느낌이었다. 다시 읽은 글은 그때와는 다른 결로스며든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사라고 다를 리 없다. 나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애를 태우고 힘을 빼지는 않겠다.
자신이 퍽 대단한 서사를 만들며 산다고 느끼던 시절에는 "마돈나의 팬과 쟌다르크의 병사"의 가치가 다르다고 믿었다. 이제는 안다. 나를 브랜딩 하는 것은 근본이 다르다거나 출처가 고급스러운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슬픔을 겪어서 커진 마음, 끓어서 넘쳤던 분노와 좌절 따위에 지지 않는 상냥한 말씨, 눈물을 닦고 보여주는 따뜻한 표정마저도 내 삶의 빅데이터에 차곡차곡 쌓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