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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꺾일 줄 몰랐다.

루트와여지

by 박하

내가 꺾일 줄 몰랐다. 놀랍게도 나날이 기록을 경신하는 초딩 외손녀의 사춘기 덕분이다.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반항과 일탈에 놀라 함께 울부짖고 소리 지르고, 설거지하던 그릇을 내동댕이 쳤다. 아이를 끌어안고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 절규하기도 했다. '청소년시기의 불안하고 아픈 뇌'를 이론으로 공부하는 것과 내 새끼의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지켜보는 것은 달랐다. 핏덩이를 안아 품에서 키운 십이 년. 눈앞의 아이는 낯설다. 반듯하고 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우려 들인 정성과 시간이 사라졌다.


아이가 방문을 잠그는 것을 시작으로 온 집의 잠금핀이 사라졌다. 핀을 빼놓으면 다른 방의 핀을 빼다가 잠근다. 의자나 가구로 문을 받쳐놓는다. 자칫 열었다간 힘으로 밀어내는 아이와 맞닥트리게 된다. 잘하면 손녀에게 맞을 수도 있겠구나.

'잘 먹이고 많이 재워서' 면역력 강하고 키 큰 아이로 키우겠다는 바람이 무너졌다. 아이는 안 자고 안 먹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손에 붙여놓은 것 같았다. 성장검사결과 저체중이었다. 몸무게가 늘지 않으면 키가 클 수가 없다고 했다. 여덟 살 때부터 일 년에 칠, 팔 센티 크던 게 멈추었다. 잠자리에서 성장점을 마사지해 주던 것도 만지지 못하게 했다. 밥 잘 먹는 한약을 먹이는 동안 밥을 더 안 먹었다.


홧병이 났다. 종일 웃을 일이 없었다. 이렇게 화가 나는 건 내게 정신적이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정신과를 갔다. 긴 문진표에 작성한 글을 보고 의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냥 화가 날 상황이라 난 것'이라고 약도 주지 않았다. 의사가 미치지 않았다는데, 미칠 것 같았다.


딸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어린것을 내 품에 안은 순간 내 세상은 외손녀였다. 딸은 국내외로 출장이 잦은 직업이다. 육아는 내 몫이었다. 버스정류장에 하염없이 앉아 타요버스에게 인사를 하며 놀았다. 걷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서 흙장난을 하고 물을 길어다 배를 띄워 놀았다. 뛰어놀다가 자는 아이를 업고 돌아오는 날들이 늘었다. 연간회원권을 끊어 놀이동산에 다녔다. 이미 운전을 중단한 뒤라 우리는 이 걸었다. 길의 꽃나무를 보고 걸으며 거미 발견놀이를 했다. 거미가 클수록 환호도 커졌다. 소리를 지르고 웃는 아이를 보면 세상이 환해졌다.


다섯 살이 되자 아이는 혼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싸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 아이가 고른 책을 읽고 한아름 빌려와서 읽었다. 꾸준히 운동을 시켰고 오래 대기해 다른 지역에 있는 어린이천문대수업도 데리고 다녔다. 한 달에 한 번 키즈아틀리에수업을 가고 공연관람도 빠지지 않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교과서를 한 권 더 구입해 내가 완전학습을 했다. 아이에게 학습을 강요하지도 학원에 보내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교과 과정을 꿰고 있으니 아이와 대화도 잘되고 공부도 곧잘 했다. 삼 학년 때 반장에 당선이 되었다. 사 학년 때는 부반장이 되었다. 오 학년이 되면 전교회장에 출마하는 꿈을 아이와 이야기했다.


천년만년 평화롭고 행복할 것 같았다. 사춘기가 올 것에 대비해 '청소년의 미친 뇌'에 대해서도 공부하여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사랑으로 키우는 내 새끼'가 그럴 리 없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 마음은 꺾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놀이터에서 집라인을 타는 아이를 밀어주다 넘어졌다. 아이는 나를 보지 못하고 앞으로 전진했다가 돌아오면서 미처 일어나지 못한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할머니 죽으면 안 돼요 나는 할머니 없으면 못살아요" 울부짖던 아이는 학년이 오르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아이에게 들은 절절한 사랑의 말은 그때가 마지막이다.


아이가 코로나에 걸렸다. 고열로 펄펄 끓는 아이와 며칠을 같이 밤을 새우고 겨우 추스른 하루, 창밖으로 오는 비를 보다가 돌아보니 누워있던 아이가 없어졌다. 정신없이 찾아 헤매다 편의점 앞에서 빗속에 떨고 서있는 아이를 보았다. 품에는 친구에게 줄 선물이 중히 안겨 있었다. 이에게는 오직 친구와의 세계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미친 거 아니가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 이제 이 아이는 이해를 해야 하는 수준이 아니구나.'


내가 꺾였다.


미래의 걱정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저 '루트'와 같은 할머니가 되어야겠구나 결심했다. 온갖 수를 끌어안아 품어주는 관대한 기호 '루트'


나는 그저 '여지'와 같은 할머니가 되어야 한다. 두 발 딛는 땅만으로는 자칫 넘어질 아이를 위해 발자국 주변의 하찮은, 단단한 흙이 되어야 하겠구나. 다짐했다.


올해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쓰기 시작한 지 일여 년이 지난 글이다. 나의 결심은 지켜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동안 아이는 멈춘 듯 하지만 크고 있다. 총량의 법칙 또한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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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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