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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브 Jan 09. 2023

지극히 개인적인 전쟁

A private war (2018)

 You're never going to get to where you're going if you acknowledge fear. I think fear comes later when you've - when it's all over.

당신이 두려움을 인정한다면 당신이 가고 있는 곳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에 두려움은 나중에 당신이 -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온다고 생각한다. (구글 번역)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했을 즈음 본 영화가 있다. 미국 여성 전쟁 기자 마리 콜빈의 인생 마지막 10년 정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프라이빗 워다. 이 영화를 감상하고 나서 무언가를 시작할 때 -그 당시 나에겐 다시 글쓰기- 최고의 프롤로그가 되어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각자 문화 수준에 따라서 들어본 적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정도의 생존 인물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데 영화로 만들어지고 쓰이는 데는 그만한 경제적 흥행과 오락적 가치보다는 그 이야기를 전파하고 그가 싸워온/버텨온/헤쳐 나온 삶을 기리는데 무엇보다 의미를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일대를 나온 엘리트 여성으로서 몸을 사리지 않고 최전선에서 전쟁 이야기를 취재하고 증언해 온 삶이 평범할 수는 없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원하는 삶도 아니다. 영화를 통해 멀리서나마 알아가고 배워갈 수 있는 기회는 반대로 누구에게나 있다.


4년을 놀다가 개발자로 커리어 전향 후 처음으로 이직했을 무렵이었는데 여유로운 국가 기관에서 살벌한 스타트업 사기업으로 옮긴 상황이었다. 입사 초기에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새로운 분야에서 내가 밀어붙일 능력이라면 하드 스킬보다는 소프트 스킬이 비중이 더 컸다. 이커머스 모듈을 중심으로 구성된 여러 팀 중 주문 관리 시스템팀에 들어갔는데 개발자 및 프로덕트 매니저를 포함해 팀 멤버가 모두 북아프리카 출신의 남자들이었다. 그중 몸집이 있고 키가 작으며 맨머리에 외모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던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의 튀니지인 사프완이 가장 시니어였다. 그를 중심으로 군인들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간 느낌으로 나머지 튀니지 및 모로코 동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시아인이자 주니어였던 나는 낄 자리가 조금 없었지만 사프완의 기와 경력에 짜그라진 다른 시니어들처럼 굽신거리면서 일해야 될 미래를 생각하니 앞날이 깜깜했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있는 느낌과 무지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느낌의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주문 가격의 데시멀 차이 때문에 사고가 나서 우리 팀에 태스크포스가 구성되었는데 리드는 사프완이 하고 나머지는 다 코드 리뷰를 했다. 나는 대학 문과 출신에 모양과 위치에 따른 텍스트가 주는 이미지에 상당히 예민한 편이고 영화계에서 몇 년 간 메일 쓰는 일이 주 업무였기에 코드 리뷰 시 자잘한 텍스트의 에러들이 눈에 너무나 잘 들어왔다. 그렇게 리뷰를 하다가 사프완의 작은 숫자의 실수가 눈에 들어왔고 보고를 했다. 이 순간 이후로 나는 “꼼꼼함”을 인정받아 사프완의 반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만큼 하찮은 일로 받아들여 지기에는 내 안에서 끓고 있던 불안과 조바심이 민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마리 콜빈이 나타난 것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최고로 치는 영화들은 따로 있지만 마리 콜빈의 인생을 다룬 영화를 5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첫 소재로 쓰는 이유는 이렇게 새로 가꾸어 보고 싶은 토양에 뿌리는 비료와 같기 때문이다. 화가 나고 힘이 들고 불공정한 생각이 들거나 혹은 반대로 만족스러운 인생 같고 남보다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 내 위치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나는 매일을 전날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 일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재택으로 인해 일과 일상의 경계가 흐지부지해져 일을 하든 휴식을 취하든 시간과 관계없이 하늘에 저녁이 찾아오면 와인을 따르기 시작한다. 이 모습이 마리 콜빈의 줄담배와 마티니 위에 살짝 겹쳐 보이지만 내가 치르는 전쟁은 사소로울 뿐이다. 스리랑카 내전 취재 중 포탄을 맞아 한쪽 눈을 잃었고 그 뒤로 PTSD가 더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러 가서 생방을 고집하다가 죽음을 당한 여자의 삶을 떠올리며 하루종일 회의로 보내는 것이 유일한 고통인 내 현재를 채찍질하게 된다.


I'm most happy with a vodka martini in my hand, but I can't stand the fact that the chatter in my head won't go quiet until there's a quart of vodka inside me.

나는 보드카 마티니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하지만, 내 안에 보드카 1쿼트가 채워질 때까지 머릿속의 잡담이 조용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다. (구글 번역)


호화스러움을 뺀 담백한 미모의 배우 로자먼드 파이크가 약간은 중성적이고 낮은 말투로 이 문장을 뱉어낸다. 전쟁터에서 고통받는 개개인들의 삶과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고 전쟁터에 있는 게 끔찍이도 싫지만 ("I hate being in war zone") 전쟁터와 같은 곳에서 겪을 수 있는 격심한 감정 변화를 통해 받는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어 계속 돌아가게 되고 마는 마리 콜빈 자신의 개인적인 전쟁이 무엇일지 짐작하게 된다. 줄담배와 알코올 중독의 바탕에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전쟁터에서 겪은 이미지들이 평온해 보이는 런던 일상으로 이미 깊숙히 침범해 버렸다. 몸과 마음 깊이 피곤에 절었고 한 남자와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경력 등 그녀의 직업이 갖는 숭고한 사명감과 달리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들쭉날쭉하는 사생활. 사적인 전쟁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이 영화의 중심이 종전 기자들이 가져오는 취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취재를 하다가 목숨까지 잃은 기자의 삶에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온전하지 않고 군데군데 깨진 삶, 그러나 인류의 진보에 헌신해온 삶.


오늘 하루는 어땠는가. 무엇과 전쟁을 치렀으며 그 전쟁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가. 인류에 1%라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공헌하는 삶인가. 1차적인 소비와 욕망으로 점철된 삶이라고 해도 모두에게 그 가운데 자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쫓아가는 자잘한 투쟁을 하고 있기를 바란다.


와인을 한 잔 더 따르며 영화를 통해서 해보는 삶에 대한 회고를 텍스트로 옮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전쟁의 일부로 "영화는 성스러워" 시리즈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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