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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브 Jun 24. 2023

싫어진다

서울 2023.06 잊지 않으려고

안타깝게도 그렇게 기다리던 여행이었음에도 혹은 그만큼 기대가 많았던 탓인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엄마와의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갖고 몇 달간 보지 못한 소중한 지인과의 재회였는데 두 가지 다 실패한 것 같다. 내가 싫었던 순간들을 기록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만큼 중요하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억한다.


3주간의 온전한 휴가였으니 길다면 긴 시간인데 지금 돌아보니 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아무런 계획도 세워놓지 않은 것에 후회가 든다. 내 집에 가는 것이니 하는 생각으로 맞이했던 오산 같다. 어딜 여행한다 한들 미리 둘러볼 곳을 어느 정도 챙겨놓지 않는가, 서울을 너무 얕봤다. 먹어야 할 리스트와 구매해야 할 리스트만 적어놓았을 뿐. 다음번에는 매일매일 오전/오후 중 할 수 있을만한 것들 최소한 한 개와 각기 다른 우선순위를 바탕으로 만나야 될 사람들 리스트를 미리 준비해야겠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무런 신경을 쓰지 못한/않은  나 자신이 싫어진다. 도착하자마자 생각만큼 달갑게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굉장히 최대한 예의를 갖춘 태도로 낯설게 임했다. 언제 만날 지, 어디서 만날 지에 대한 제안을 먼저 하지 않은 것이 싫어진다. 사람 마음은, 그것이 내 것일지라도 알 수가 없다. 떨어져 지낸 시간들의 어색함이 갖고 있던 관심이나 애정을 짓눌러 버리는 것 같다. 남아있는 불씨를 다시 지피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나 자신이 싫어진다.  


계획했던 가족 1박 2일 여행이 무산된 전 날 마음에 아무런 변동이 없었던 나 자신이 별로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부모님과 나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무산된 여행이 밑받침이 되었을 것이고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정말 사소한 순간의 어리석음으로 사태가 매우 커져서 첫 번째 토요일을 지옥같이 보낸 것이 싫어진다. 화를 풀지 않는 엄마에게 울며 파리로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다시는 안 오겠노라고 소리친 이기심이 지독하게 싫어진다. 날씨 좋은 이틀간을 엄마의 심정을 달래려고 애쓰다가 마음대로 안되어 다시 화가 솟아 또 울던 순간이 싫어지고 동생과 남편에게 전화해서 하소연 한 순간이 후회된다. 엄마와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 점은 있다. 주어진 시간이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을 생각하며 오후에는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남가좌동 주변에 거의 머물러 있었다.


엄마와의 갈등은 동생의 개입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은 서먹한 상태라 둘이 결정을 못 내리고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서 수요일에 고즈넉한 덕수궁 옆 시립 미술관에 혼자 구경간 것이 후회된다. 미술관의 아치형 창문의 고요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지만 엄마와 같이 공유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미술관을 나와 집까지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한적한 덕수궁 돌담을 혼자 걸어간 순간이 후회된다.


이런저런 100% 동의하지 못하겠는 생각이 들지만 멀리 있기에 더더욱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주는 딸 노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뒤늦게 한 것이 후회된다. 칠십에 가까워져 가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한 나 자신의 오만심이 싫어진다. 누구 덕분에 오늘의 내가 되었을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잘난척하며 엄마의 상황을 판단한 나 자신이 지겹도록 싫어진다. 엄마가 덜 불행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용서가 아주 조금은 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엄마가 얼마나 불행한지 알 길이 없다.


좀비처럼 살던 두 번째 주 초에 약속 하나가 무산되었는데 그 순간에 안도를 한 것이 싫어진다. 누군가, 하지만 중요한 사람이 나에게 한 친절한 제안에 예의를 차리며 거절한 순간이 후회된다.


순하고 부드럽고 두리뭉실 뭉툭하게 세상을 마주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어지고 매 순간 깨달음과 시행착오의 반복으로 나아져봐야지라고 생각하는 (그러나 정말 소원대로 잘 될까 의심스러운) 날들이 싫어진다. 6개월 만에 다시 온 서울이 일상처럼 다가온 것인지 평소의 까칠함을 이곳저곳에 퍼트려 놓은 게 후회된다.


후회되고 싫었던 서울에서의 순간들을 돌아보며 뼈저리게 되새긴 문장이 있다. 뾰족한 사람이 되지 말자. 싫을 순간은 언제나 올 수 있겠지. 나는 그 상황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뾰족한 사람이 되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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