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애매 Jan 22. 2024

[산책일기] 너무 가까운 카페는 싫어서요.

 한창 MBTI가 유행하던 때에 본격적으로 테스트를 시작해보려는 저를 향해 친구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던진 말이 있었어요. "E는 밖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고, I는 집에서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사람이래. 애매 너는 검사 안해도 E야."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격리되었던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밖에 나갔으니까요. 대학생 때는 강의가 끝나면 곧장 집에 가지 않고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혼자 서울 한복판을 돌아 다니거나 친구들을 만나야 집에 가는 저만의 규칙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주말에도 이른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꼭 어딘가를 거닐다가 집에 가는 사람이었죠. 밖에 있어야 힘이 나니 어쩌겠어요.


 지금도 여전히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만 10여 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저 '목적없이 걷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겠죠. 특히 이 글을 쓰는 오늘처럼 딱히 약속이 없는 주말이면 이른 아침을 먹고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고 일단 밖에 나옵니다. 그리고 정처없이 걷다가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가 차를 한 잔 마시고 아무일 없었던 듯 다시 집에 돌아갑니다. 그래야만 주말에 할 일을 마친듯한 이 기분을 쫒다보니 이제는 강박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주말의 낭만을 지켜줄 카페를 찾는 저만의 기준은 확실합니다. "걸을 만한 거리인가. 적어도 20분 이상 산책해서 걸어갈 만한 곳인가"

 커피도 안마시고 디저트도 잘 안먹는 저에게 카페에서 내어주는 '맛'은 그리 중요치 않지만 그곳에 가기까지 나만의 산책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혼자 보내는 주말 자유시간은 카페로 걸어가는 길에서 시작해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서 끝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길을 나서면 항상 다니던 카페도 매번 다르게 느껴지곤 합니다. 봄철 벚꽃을 보며 카페에 도착한 날에는 '손님들이 모두 꽃구경 나온 김에 커피 마시러 온건가?' 싶은 생각에 왠지 낭만적인 공간처럼 느껴지고, 장마철 세찬 비를 뚫고 카페에 도착한 날에는 '휴 도착했다, 오늘은 재난 대피소 같네' 싶은 생각에 평소보다 더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조금 선선해진 바람을 느끼며 걸어간 날에는 '따뜻하게 마실까, 차갑게 마실까. 이런 고민을 하다니 가을 바람 맞나보네' 라는 생각을 하며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도 하죠. 매번 같은 길을 걷더라도 그 날의 날씨, 기분, 고민거리 등에 따라 전혀 다른 산책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주말에는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 작은 우산을 하나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현관 앞에 서니 생각보다 바람이 차가웠고 이미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더라구요. '아, 오늘은 멀리 못가겠다'라는 아쉬움을 안고 일단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그래도 20분은 채워야 산책한 기분이 들테니 가까운 카페까지 멀리 돌고 돌아 가기로 했습니다. 비가 오는 탓에 거리와 공원에 사람이 없었지만 꿋꿋하게 걸어나가면서 이 날씨에도 굳이 밖에 나온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느껴졌어요. 오직 그 생각뿐, 간만에 에어팟도 꽂지 않은 채 비 내리는 겨울의 공기만 느끼며 잡념 없이 산책을 이어갔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덧 40분이 지났길래 잠시 목을 축이러 목적지로 발길을 돌렸죠.


 예상 시간보다 2배 더 걸려 도착한 동네의 작은 카페는 잡념 없이 차분해진 저의 마음이 쭉 이어지기라도 바라는 듯이 아늑하고 조용했습니다. 열심히 걷느라 조금 뻐근해진 다리를 잠시 멈춰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생각했습니다. '집에 갈 때는 어떤 길로 걸어갈까?' 산책 중독자가 따로 없네요.


 누구든 한 번쯤은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카페까지 걸어가는 길의 풍경과 그 시간'에 더 집중해보면 좋겠습니다. 이미 익숙해진 단골 카페에 가는 길에는 새로운 설렘이 가득해져 더욱 애정하는 공간이 될 거에요. SNS로 유명한 카페를 찾아 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가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래도 걸어오는 길이 행복했으니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아쉽지 않게 돌아서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저와 같은 취향을 갖게 되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라 생각해요. "너무 가까운 카페는 싫어서요."

작가의 이전글 [산책일기] 우체국 심부름을 기다리는 직장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