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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Jun 26. 2024

마츠코의 삶은 무엇이었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제목부터 아주 요상하다. 한국어로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지만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영어 제목을 기준으로 하면 그냥 'Memories of Matsuko' 인데,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 영화는 전에 영화 리뷰 채널에서 결말포함으로 보긴 했지만 ..ㅎ_ㅎ 이 영화를 천천히 곱씹고 싶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한 번에 다 보지는 못하고 쫌쫌따리로 나누어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 자체가 밝은 색감과는 대조되는 아주 절망적이고 퇴로 없는 내용들만 다루고 있는 것 같아서, 마츠코의 삶을 보는 내가 다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새벽에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서는 눈물을 쏟았을 만큼 감정의 노동에 대한 가치는 분명히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국어로 된 제목부터 살펴보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에서 '혐오'라는 것은 무엇을 수식하는 것인가? '혐오스런'은 관형어로 명사를 꾸민다. 이때의 명사는 '마츠코'가 되는 것인가, '마츠코의 인생'이 되는 것인가? 마츠코가 혐오스럽다는 것인지, 마츠코가 살아 온 일생이 혐오스럽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둘 다 슬프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되짚어 보면서 내가 가지게 된 생각을 반추해보고자 한다.



(네이버 영화 줄거리에서 그대로 가져옴)

도쿄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쇼는 고향의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행방불명되었던 고모 마츠코가 사체로 발견되었으니 유품을 정리하라는 것. 다 허물어져가는 아파트에서 이웃들에게 '혐오스런 마츠코'라고 불리며 살던 그녀의 물건을 정리하며 쇼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마츠코의 일생을 접하게 된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던 마츠코에게 지난 25년간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제자가 일으킨 절도 사건으로 해고당한 마츠코는 가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동거하던 작가 지망생은 자살해 버리고, 그의 친구와 불륜을 시작한 마츠코는 곧 버림받고 절망에 빠져 몸을 팔게 된다. 기둥서방에게마저 배신당한 마츠코는 그를 살해, 8년형을 인도 받는다. 출소 후, 미용사로 일하던 마츠코는 자신을 해고당하게 만들었던 절도사건의 범인인 류 요이치와 재회하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스포 o)

마츠코의 얼굴 찌푸리기와 아버지


 마츠코의 어린 시절을 보면 참 안 되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픈 여동생에게만 온 관심이 쏠려 있던 아버지였기에, 마츠코는 언제나 아버지의 관심에서 후순위에 위치해 있었다. 잘 웃어주지 않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웃었던 순간은 본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뿐. 이후 마츠코는 아버지를 웃게 하기 위해 매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이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나중에 미츠코는 당황할 때마다 이런 표정을 짓게 된다.

 처음에는 마츠코의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아픈 딸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맞지만 마츠코에게는 왜 그리도 무뚝뚝하게 대했던 것일까? 결국 마츠코는 여동생과의 계속된 비교와 강요 아닌 강요된 양보 속에서 염증을 느껴 충동적으로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아픈 여동생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랬던 것일까... 싶은데

 그냥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이 부분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건 마츠코가 어떤 '결핍'을 안게 되는 유년기의 배경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마츠코와의 관계는 참 마음이 아프다. 마츠코는 본인이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관심도 받지 못하고, 늘 소외되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마츠코가 가출한 그날 이후부터 아버지의 일기장 맨 마지막은 '마츠코 연락 없음' 이라는 문장으로 끝나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에 늘 적혀 있었던 그 문장을 조금만 앞으로 당겨서 표현해 주었으면 마츠코가 아버지의 사랑을 좀 더 잘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마츠코가 마지막 문장까지 기다렸다가 볼 수 있었다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니 만약은 가정하지 않기로 한다.

마츠코와 남자들


 영화를 보면서 참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까웠던 부분이다. 말 그대로 마츠코의 삶은 그 기간 동안 함께했던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처음 마츠코가 동거를 시작했던 사람은 작가 지망생인 테츠야였다. 말이 작가 지망생이지 나에게는 그냥 폭력범이었다 (...) 툭하면 마츠코를 때리며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별다른 소득활동이 없는 마츠코에게 '몸이라도 팔아 돈을 가져오라' 고 했을 만큼 '저 사람을 대체 왜 좋아하는지' 싶은 순간이 참 많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강요에 못 이겨 유흥업소에 찾아가게 되지만, 아직 마츠코는 이 일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결국 가족의 연을 끊기로 다짐하고 받아 온 돈을 연인에게 건넨다.

 정서불안에 어떤 정신적 결함이 있는 것 같은 테츠야는 마츠코가 건넨 돈을 받아들고 혼란스러워하며, 마츠코를 때리고, 폭력을 행사하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라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짖이기며 자살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고 스스로를 이야기했던 나르시스트를 왜 좋아하는지 나는 도저히! 까지는 아니고 아무튼간에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이게 마츠코의 거의 첫 번째 남자라고 할 수 있다.

 마츠코는 테츠야의 자살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면서 지금이야말로 본인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테츠야가 자살한 후, 주변 작가 중 한 명이었던 타케오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테츠야를 잃은 슬픔을 위로해 주며 마츠코와 불륜 관계가 된 타케오는, 매주 수요일이면 그녀를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 영화 중반 마츠코는 타케오가 자신을 찾아오는 수요일을 'happy wednesday'라 부르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앞서 말했듯이 불륜 관계였다는 점이다. 타케오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마츠코는 어느 날 타케오를 미행해 그의 집을 알아냈고, 본처의 얼굴을 본 후 '이 여자라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아내에게 불륜을 들킨 타케오는 잔인하게 마츠코를 버린다. 내가 당신을 좋아했던 것은 네가 좋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테츠야의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내가 테츠야에게 느꼈던 열등감을 당신을 안으면 해결될 것 같아서였다며, 생각보다 당신의 몸이 좋아 오래 만나 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츠코를 버리고 떠난다.

 이번에는 나르시스트가 아닌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못난이에게 실컷 마음을 퍼 주고 배신당한 마츠코이다...



 그렇게 연이은 상처를 뒤로한 채 마츠코는 몸을 팔기 시작한다. 

 과거 테츠야가 돈을 벌어 오라고 강요했을 때에는 쉽게 시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무언가를 한결 내려놓게 된 마츠코는 이제 더 이상의 스스럼은 없이 일을 시작하게 되고, 단숨에 업소의 에이스가 된다.

 많은 돈을 벌고, 인기를 얻지만 사실 인기는 한때. 몇 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츠코는 나이가 들어 버려 결국 업소에서 쫒겨난다.

 그리고 타모츠라는 남자를 만난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뭉친 타모츠와 함께, 마츠코는 또다시 몸을 팔게 되며 수익을 올린다. 하지만 이내 벌어들인 돈을 돌려주려 하지 않는 타모츠와 실랑이를 벌이다 그를 살해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마츠코는 징역을 살게 된다. 마츠코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츠코가 징역을 살기 전, 자살을 결심하고 전 연인이었던 테츠야가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했던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물길이 막혀 죽을래야 죽기 힘든 공간이 되어 버렸다. 멍하니 그 물길 속에 있는 마츠코에게 '그곳은 물길이 막혔다'고 알려 준 소박한 미용사를 마주한다. 마츠코의 새로운 남자인 시마즈 켄지이다.

 외모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잘 사는 것도 아니나 내가 생각했을 때 함께 있을 때 마츠코가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둘은 한 달 정도 동거를 하며 미용실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고, 마츠코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그녀의 인생을 이 사람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평화로운 순간도 잠시, 경찰이 마츠코를 잡아가며 그녀의 복역은 시작된다.

 7년의 복역 기간 동안 마츠코는 켄지와 다시 조우해 미용실을 꾸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규칙적으로 살아간다.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사랑이라면 뭐든 살아갈 수 있어'라고 답하며 말이다.

 그러나 출소 후 찾아온 미용실에서 켄지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츠코는 차마 그에게 인사하지 못한 채 그의 미용실 앞에서 되돌아온다.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이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일까. 마츠코는 결국 또 다시 혼자가 된다.


 그리고 마츠코의 마지막 남자인 류 요이치를 만난다.

 사실 이 인물은 극중 아주 초반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마츠코가 중학교 교사에서 해임되게 만들었던 절도 사건의 범인이다. 류는 본인의 도둑질을 마츠코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웠기에, 어째보면 마츠코의 방황을 이끈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야쿠자로 활동하던 류는 다시 마츠코와 만나며 '그때 거짓말을 했던 것은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마츠코와 연인이 된다. 몇 가지의 사건 끝에, 야쿠자로서의 삶을 반대하던 마츠코도 '혼자 있어도 지옥, 함께해도 지옥이라면 너와 함께하겠다' 라고 외치며 야쿠자의 여인이 되며, 언뜻 보면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으나... 공금을 횡령한 류의 행위가 조직에서 발각되며 둘은 생사를 넘나드는 도피를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류는 경찰에 자백해 교도소로 끌려가게 된다.

 류는 감옥에 있었지만, 마츠코는 이내 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하지만 류는 이런 마츠코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색하기만 하다. 결국 마츠코와 헤어지는 것이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출소 날 본인을 기다리고 있던 마츠코에게 주먹을 날리고 도망가 버린다.

 여기까지가 마츠코가 만난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류와의 이별 이후 마츠코는 다시는 아무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고향의 풍경과 비슷한 강이 있는 낡은 아파트로 들어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홀로 시간을 보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마시는 삶을 반복하며 말이다.

왜?


 마츠코가 믿었던 사랑과 사람과 인연에 배신당했을 때마다 되뇌이는 말이다.

 왜?

 마츠코의 질문 아닌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이 사람이 나를 떠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나 잘해주고 온 맘을 다했는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렇다고 마츠코는 화를 내지도 않는다. 연인을 딱히 원망하지도 않는다. 영화 어디를 보아도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왜일까? 

 나는 마츠코가 연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붓는다고 생각했다. 내 눈에 마츠코는 단 한 순간도 자기 중심적으로 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적인 것이 꼭 이기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모든 걸 쏟아내버리는데, 과연 이런 마츠코의 행태는 안전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을 퍼주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마츠코는 사랑을 토해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으나, 나는 내가 있어야 연인이든 뭐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맞추다 보면 어느 새 나는 그 사람 주위만 빙빙 공전하는 행성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서로가 충실한 개인으로서 위치할 때 비로소 안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 시각에 입각해 본다면 마츠코의 사랑은 안정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마츠코도 분명 이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마츠코는 왜? 라는 질문을 어떤 의미에서 던진 것일까. 이건 너무 어렵네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듯 합니다

지옥일지라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아



 극 중 마츠코는 그녀의 연인들에게 맞는다. 사실 안 때린 연인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이다. 아마 미용사였던 켄지 정도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마츠코가 왜 그들을 떠나지 못하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잘 이해는 안 된다. 그러나 극 후반부로 가면 그녀의 이런 대사가 나타난다.

 "그래도 혼자인 것보다는 나아"

 이게 마츠코를 혐오스러운 일생으로 이끈 생각이지 않을까? 혼자 있는 시간 역시 지옥이었기에, 마츠코는 자신을 때리고 폭력을 행사해도 그저 함께 교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과연 혼자인 것보다는 더 나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츠코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마츠코는 언제나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들어와 '다녀왔습니다'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었고, 극의 맨 마지막 죽기 직전에도 어린 시절 본인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가며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마츠코를 혐오하기 이전에 마츠코는 혼자됨을 혐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한 인연은 위태롭기 마련이다. 결국 부재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연결시켜 놓은 관계에서 마츠코는 항상 상처를 입게 되고, 끝내는 아무도 믿지 않고 철저히 혼자 살아가기로 다짐하며 본인이 혐오했던 혼자의 상태로 접어든다. 정말로 혐오스런 마츠코가 된 것이다.

신과 애정결핍



 아이러니하게도, 마츠코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지만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도망친 류는 감옥에서 '신약 성서'를 읽으며 자신에 대한 마츠코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녀를 찾아 돌아온다. 하지만 마츠코는 영화 속 상황처럼 이미 죽은 상황.

 마츠코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그녀가 살던 아파트에 머물던 조카 쇼에게 류는 마츠코는 본인의 신이었노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단 한 번도 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떠올린 적이 없었다. 마츠코는 그냥 애정결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마츠코는 참 바보같다. 난 사람들이 마츠코를 혐오스럽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마츠코의 바보스러움에서 나왔다고 여겼다. 몇 번이나 좋지 않은 연인들을 만나고도 스스로를 연인에게 맡겨 버리는 마츠코의 대단한 순수함, 사람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본인을 놓아 버리는 무책임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애정결핍인 한 여자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영화라고 생각을 한 채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후반부 류가 말한 신이라는 대사는 어째보면 참 묘했다. 그리고 영화 가장 말미에 마츠코의 조카 쇼의 대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모를 보고 류는 신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무엇 하나 똑똑하지 못했고 철저하게 불행했던 사람에게 신이라니... 난 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만약에, 이 세상에 신이 있어서 고모처럼 사람들을 웃게 하고 힘을 북돋워주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지만 자신은 너덜너덜하게 상처 입고 고독하고 패션감각은 꽝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나는 그 신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방증해 주기라도 한 듯, 마츠코를 배신했던 모든 사람들까지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마츠코가 늘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웃는다. 마츠코는 이들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 몰라도 이들에게 마츠코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모습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들로부터 고통받고, 그 악한 성정으로 인해 끊임없이 배신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인간을 구원하려 인간 세상에 도움을 주고, 마침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 치욕스럽게 죽게 만들었던 신의 모습은, 사실 어째보면 내가 마츠코의 애정결핍이라고 생각했던 부분과도 어느 부분 닮아 있다. 그리고 마지막 마츠코가 어린 아이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 류가 강조했던 신의 모습을 극대화하는 장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써, 마음으로는 이런 대사에 동의해도 사실 몸을 팔거나 살인을 한 마츠코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기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영화의 말미로 갈수록 이 영화는 어째보면 종교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마 온 우주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일 텐데도 예수님의 출생은 너무 초라했다. 우선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서 불미스러운 출생이 되었고, 화려한 집이 아니라 말들이 울부짖는 마굿간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을 믿고 따랐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또 고문을 받고, 또 고초를 당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혐오를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예수님의 삶만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동시대의 누군가는 예수님을 혐오했을 수도 있다. 사실 신은 우리 생각만큼 현실 세계에서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되려 초라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 마츠코가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도 이런 연출이 나오는 것만 같다. 마츠코는 계단을 서서히 올라가고, 이 계단은 하늘로 연결된다. 천국이나 승천을 연상시키는 듯한 장면이다. 

마츠코의 삶은 무엇이었나



 수많은 모습을 거치며 살아 온 마츠코의 삶은 무엇이었나?

 애정결핍에 굶주린 한 여자의 삶인지, 류의 말대로 신의 삶인지 나는 결론을 내리기가 힘들다. 사실 지금 머리가 안 돌아가서 생각하기가 힘든 거지만 

 적어도 마츠코의 인생은 바보 같고, 안타깝긴 해도 혐오스러운 인생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에 나왔던 인물들이 마츠코가 늘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웃음짓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혐오하는 사람이 즐겨 부르던 노래를 어떻게 웃으며 부를 수 있을까!

 아직 한 번 밖에 보지 못했고 볼 때마다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많이 볼 것이라고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마츠코의 일생을 보는 것은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어린 왕자' 처럼 시간이 흐르고 흐를수록 이 영화에 대한 나의 느낌이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여담

 나는 이 영화만의 연출이 참 좋았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동화같은) 연출에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지만 오히려 그게 이 영화만의 매력이었던 듯 하다. 특히 강렬한 원색의 색깔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 색깔들을 2시간 동안 보다 보면 정신은 피폐해지지만 확실한 분위기 형성에는 도움이 된다!


https://youtu.be/Edwsf-8F3sI?feature=shared


 또 영화에 나오는 배경음악도 참 좋았다. Feeling good이라는 노래가 영화 중간중간 나오게 되는데, 이게 참 적절하게 쓰여서 자칫 어색할 수 있는 일본과 서양의 만남에서도 가감없이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외에도 영화 오프닝에 나오는 노래들도 좋으니 나중에 볼 기회가 있다면 노래에 집중해서 들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도저히 검토할 에너지가 안 남아 있는 관계로 그냥 적당히 ㅎ_ㅎ 이런 분위기의 생각을 느꼈구나 정도로 봐 주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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