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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성 Mar 05. 2023

열의의 씨앗

삶, 행복, 그리고 열의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은 삶을 향한 열의를 논한다. 열의의 유무는 행복과도 직결되고, 따라서 사람들은 열의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의 없는 삶은 무기력하고 무기력한 삶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삶 그 자체로는 행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삶은 부조리하다. 삶의 모습은 시지프의 형벌과 닮았다. 시지프는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린다. 언덕의 정상에서 바위는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는 반복해서 바위를 민다. 이 굴레 속에 갇히는 것이 시지프의 형벌이다. 카뮈는 바위를 미는 무의미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삶과 닮았다고 말한다. 살아가는 것이, 성취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이 어떻게 의미가 없냐고? 삶은 우연이기 때문이다. 카뮈의 시대에서 과학은 필연을 부정하였다. 그때의 과학은 인간의 출현도 당신의 탄생도 우연이라고 이야기했다. 모든 사건들은 우연이기에 거기에 내재된 목적은 없고 따라서 삶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시지프의 형벌을 표현한 이미지 


카뮈는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살하거나, 극복한다. 극복의 방법은 실존의 부산물이 아닌 실존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무의미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를 사랑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에 대입하면, 돌을 다시 밀어 올린다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이 그리고 세계가 통계적인 우연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세계가 우연이라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주장은 다르다. 프롬은 인간과 사랑하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자유를 얻었기에 불확실함을 얻었고, 그렇기에 불안을 얻었다. 불안의 궁극적 해소 방법은 인간과의 융합이다. 사랑만이 불안에서 오는 고독감을 온전히 해소한다. 


프롬은 (카뮈의 입장에선) 실존의 부산물인 사랑을 통해, 카뮈는 실존 그 자체를 통해 살아가라고 하는 점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그러나 둘 모두 부조리와 불안과 같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이겨내라고 한다. 러셀 입장에서 보아도 카뮈를 따르는 사람과 프롬을 따르는 사람은 비슷하다. 한 명은 실존 자체에, 한 명은 사랑에 열의를 가진 사람이다. 열의의 대상은 다르지만 유무의 측면에서 카뮈와 프롬은 범주를 공유한다.


나는 러셀의 말에 동의한다. 열의를 가지는 삶이 행복에 더 가까운 삶이라는 점에, 그리고 열의의 대상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무엇이든 괜찮다는 점도 동의한다. 프롬의 말처럼 사랑의 열의를 가지든, 카뮈를 따라 실존 그 자체에 열의를 가지든 상관없다. (다만 열의가 집착이 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대상에 열의를 가진다는 것은 대상을 위해 자신을 관리하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대상을 추구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삶을 버리며 대상에 집착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열의는 목적과도 비슷하다. 친구와 대화를 하는 것, 잠을 줄이며 공부하거나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두 열의이다. 목적에도 궁극적 목적과 그 전의 목적이 있듯이 열의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자면, 고등학생의 입장에서 시험 점수를 향한 열의는 대학을 향한 열의이고 대학을 향한 열의는 물리학을 향한 열의인 상황이 있다. 또한 열의는 추상적인 열의와 구체적인 열의로 나뉜다. 위의 예시에서 물리학을 향한 열의는 추상적인 열의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열의들은 구체적인 열의이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의는 추상적인 열의이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의 공연을 향한 열의는 구체적인 열의이다. 두 가지 중 우리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열의는 추상적 열의이다. 구체적인 열의는 완결되지만 추상적인 열의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추상적 열의를 결여한 구체적 열의는 공허하다. 


열의의 대상을 찾는 것에 시간제한은 없다. 그러나 다양한 열의의 대상들을 많이, 그리고 빨리 가지면 (열의들 사이에서의 균형을 잡는 일은 힘들겠지만) 삶은 다채로워진다. 열의의 씨앗들을 많이 찾기 바란다. 그 씨앗들이 피어날 수 있는 시기와 상황이 오면 꽃을 피우기 바란다. 열의의 씨앗은 당신의 삶을 붙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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