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일까 사치일까
(1부에 이어서)
담배보다 짙은 여행 중독을 넘어 나는 '비싸고 좋은 숙소' 중독에 빠져버렸다. 마약과 도박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시도 때도 없이 에어비앤비, 스테이폴리오의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렸다. 사진첩에 비싼 숙소 사진이 수백 장 쌓이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돋보기에도 온통 숙소나 인테리어 이미지들만 떴다. 알고리즘이 나를 인테리어 디자이너나 공간의 호스트쯤로 인지하지 않았을까?
'오기'로 시작한 첫 경험
혼자 여행을 하는데 굳이? 난 '호캉스'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내 방에서도 충분히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제주 여행을 가서도 주로 조용한 게스트하우스의 1인실이나 적당한 금액대의 호텔에 묵곤 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풀리지 않는 궁금증은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왜 저렇게까지 돈을 내고 비싼 숙소에 가는 걸까 하고. 무엇보다 비싸고 좋은 숙소에 '혼자' 묵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더 욕심이 생겼다. 누구나 쉽게 생각하지도, 도전하지도 못할 경험일 테니까.
삶의 인사이트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타이밍 좋게 회사에서 성과급이 들어왔고, 이번 여행엔 내 생일도 껴 있어서 충분히 럭셔리한 소비를 합리화할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사진첩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신상'으로 지어진 숙소를 예약했다.
총 4박 5일 일정이었고 3박은 게스트하우스, 마지막 1박을 좋은 숙소에 묵는 계획이었다. 아무래도 여행의 마지막이자 생일날을 좋은 공간에서, 고독하게 보내고 싶었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다, 체크인 시간에 딱 맞춰 입실했다. 긴장한 채 도착한 숙소 앞. 역시 비싼 숙소는 이런 걸까. 한참을 헤매다 여기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 무렵 숙소 간판을 발견했고, 무거운 철문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철문을 밀자 사진으로만 봤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문을 열고 본 숙소의 첫인상. 전통마루 형태의 낮은 침실, 좋은 스피커, 실내 온수풀이 보였다. 평 수가 엄청나게 컸던 것은 않았지만 숙소가 아닌 무슨 전시 공간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잔다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낯선 상황에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캐리어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겉옷까지 걸친 채 오랫동안 멍 때리며 주변을 살폈다. 괜한 부담감? 에 사진 한 장도 안 찍고 마루 바닥에 앉아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30분가량 있었던 것 같다. 길고 긴 고민 끝에, 인스타그램 '친한 친구'에 함께 이 난관을 헤쳐나갈 동료를 구하는 '비밀 초대장'을 올렸다.
(기준 2인, 최대 4인까지 숙박 가능)
"이런 좋은 숙소에 왔는데, 함께 탐험하실 분!"
때마침 지난 제주도 여행 때 알게 된 친구도 제주도 여행 중이었고, 연락이 닿았다. 친구는 내 숙소로부터 한 시간 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오기가 마냥 쉬운 여건은 아니었지만 숙소 사진을 보여주자마자, OK, 콜! 하며 한 시간 만에 날아왔다. 친구가 온다고 하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드디어 짐을 풀고, 친구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친구는 금방 도착했고, 그렇게 우린 맛있는 대화를 곁들인 와인을 마시며 본격적으로 여유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감성 가득한 재즈를 크게 틀어 놓은 채, 밤하늘의 별을 벗 삼아 온수풀에서 아이처럼 뛰놀았다. 아마 혼자였으면 무서워서 온수풀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렇게 친구 덕분에 두려움을 이겨내고, 좋은 숙소의 진가를 하나하나 맛보게 되었다.
"텅장되는 소리 안 들려?"
그날 이후, 좋은 숙소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일상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집은 지금 어떤 상태지? 내 방은 공간의 게스트인 나를 배려하고 있나? 내 방의 호스트로서 너무 소홀했던 것 아닐까? 한 번 여행 갈 돈으로 내 방을 바꿔보면 어떨까?'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오롯이 나를 위한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모든 가구들을 들어내어 대청소부터 했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과감히 버렸다. 버리기 아까워 가지고 있던 계륵 같은 물건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리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망설임 없이 사들였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무드를 낼 수 있도록 향과 조명부터 바꿨다. 낡은 서랍장과 선반들을 모두 버리고, 나의 행동 패턴과 취향에 맞는 가구와 소품들을 사들였다. 이불, 베개, 러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각티슈 커버 케이스, 마우스패드까지도.
공간의 경험을 통해 삶의 가치를 바꾸다
공간이 바뀌니 나의 하루가 달라졌다. 나의 행동 패턴이 공간에 맞게 바뀌었다. 보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괜히 자세를 곧게 세우기도 하고, 옷차림도 살펴보게 됐다. 그렇게 하루가 달라지자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기분이 들었고, 기분에서 그치지 않도록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도록 변화하기 시작했다.
작은 것들부터 습관화시키려고 했다.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대청소를 하며, 독서하기 좋은 조명 아래 꼿꼿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스트레칭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때 들인 습관은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빠짐없이 잘 지켜지고 있다.
놀랍도록 신기한 일이다. 비싼 숙소에서 한 번 잤다고, 이렇게까지 내 삶이 좋게 바뀌다니.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다. 건축이나 인테리어 전공이 아닌 나에게도 좋은 공간이 주는 힘은 상상이었다.
그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좋은 숙소를 가는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단순히 '잠'만 자는 것이 아닌 공간에서의 '경험'을 통해 공간이 지닌 '가치'를 구매하는 것이다. 직접 오감으로 느끼기 때문에 내 삶에 극적인 변화를 비교적 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것 같다. 꼭 비싸고 좋은 숙소가 아니더라도, 내가 현재 있는 공간을 보다 나에게 맞게, 나의 방식대로 변화를 주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넣는 것이 현재의 나에겐 당연한 것이 됐다.
어떤 이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통해 익숙한 공간의 좋은 면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편함을 통해 내 일상 공간의 가치를 인지하게 되기도 하니까. 확실한 건 어떤 면이든 좋은 공간을 통해 얻는 경험은 '잠'을 자는 곳 그 이상으로서, 내 삶의 가치를 판단하게 만들어주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