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위한 여행 (feat. 오, 여정)
- 여정의 대사
- 여정의 대사
6년 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 꽂혀, 홀로 파리로 떠났던 적이 있다.
여러 국가를 찍먹하듯 '관광'하는 것이 아닌 한 나라에서 오랫동안 살아보고 싶었다.
그 나라, 그 도시 사람들의 숨결을 옆에서 느끼면서.
(여행은 살아보는거니까!)
그러나, 현실은 때론 영화보다 잔혹하다 했다.
비행기에서 유심칩을 바꿔 끼다 안에서 깨져서 벽돌이 되어버린 아이폰.
건장한 황인 남자가 공항에서 낚아채려던 20kg의 내 캐리어.
시차를 잘못 계산해서 생 돈 날린 샹젤리제 거리의 고급 호텔.
모두 여행 첫날, 불과 두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리 관련 에피소드는 나중에 다시 자세한 풀어봐야겠다.)
경주의 밤과 재즈 음악은 한국적인 비주얼 위에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영상에서 음악은 정말 중요하다. 나는 뮤직비디오가 아닌 광고임에도 음악을 미리 선정하고 그에 맞춰 기획과 편집을 한 적도 있다. 음악을 잘 쓰기로 유명한 애플, 시몬스 같은 브랜드들의 광고를 소리를 키고 끄고 비교해서 보면 그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음악 뿐만 아니다. '아 이 감독, 참 맛있게 만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카메라 연출. 급속도로 발전된 둘의 관계처럼, 줄곧 보여주었던 정적인 픽스 앵글에서 벗어나 과감한 시도를 했다. 로우 셔터(low shutter)를 활용하여 과감하게 핸드헬드 및 짐벌 촬영을 시도했다. 과하게 쓰면 어지러울 수 있는 이 카메라 무빙은 여정과 경주의 서사를 감성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앵글도 좋았다. 차량 안에서 찍은 컷이 특히 좋았다. 정말 이 둘의 사랑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
물론, 몽환적인 색감도 크게 한몫했다.
(그 원조로서, 왕가위 연출,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의 '중경삼림'을 보면 좋다.)
경주의 마지막 대사는 생략되어 있지만 '주무세요~', '네네'의 문자를 봤을 때 둘은 다행히도(?) 각자의 공간에서 밤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경주가 선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자'라는 아날로그 방식과 '네네'에서 느껴지는 딱딱해 보이지만 담백한 경주의 말투. 옆에 아무도 앉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여정이가 슬며시 웃으며 옆 사람에게 건넨 경주빵. 그냥 흘러가는 설정처럼 보이지만 극 중 캐릭터의 성격과 감정 변화가 너무나도 잘 드러났다. '로맨스'로 끝나는 게 아닌 '한 인물의 삶을 담은 성장 드라마'로 장르가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오래 만났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제주도를 갔다.
새로운 인연을 찾으러 갔던 것은 아니다.
(당시 너무 힘들었고,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2박 3일 동안 (말 그대로) 한 마디도 안 한 적도 있다. 혼자 비싼 숙소에 종일 누워 넷플릭스를 보거나 소설책만 읽기도 했다. 바깥도 안 나가고 배달의 민족으로 두 끼를 때운 적도 있다. 그럼 왜 그렇게 많이 갔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몇 번이나 더 제주로 향했지만, 여전히 그 답은 미궁 속에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난 여행에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무엇을 바랐지도, 무엇을 안 바랐지도 않았다.
그냥. 이유가 없는 여행. 파워 J인 내가 숙소 빼곤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었던. 정말 아무와의 추억도, 사람이 나온 사진이 한 장도 않았던 여행.
아, 한 가지는 남았다고 해야 하나. 여행을 내가 왜 가야 하는지, 내가 왜 가고 싶은지. 여행에 대해 더욱더 격렬하게 생각하게끔 만들어준 여행. 여행의 이유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여정이가 읽으려고 했던 책은 하필(?)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김애란 작가님의 책 비행운이다.
비행기가 날 때 길게 나타나는 구름이자, 행운이 아닌 非행운, 2가지 중의적 의미를 가진 제목이다.
정말 여정이가 떠난 여행과 완벽하게 어울린다. 책을 읽고 있으니 알게 된, 놀랍도록 섬세한 연출이었다.
(감독님의 감성이 너무 예쁘다.)
카메라를 달라는 경주에게 자신의 손을 내민 여정. 비록 바로 다시 손을 놓고 카메라를 주었지만, 여정이가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직접 드러냈던 장면이다. 사진만 봐도 온 몸이 찌릿해지는 느낌.
(내가 경주였다면 심장 터졌을 것 같다.)
(여정이 mbti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제 느낌엔 F와 T가 6:4 정도인 INFP가 아닐까?)
최근에 화제였던 '솔로지옥2'의 '덱슬기' 커플의 수영장 장면이 떠오른다.
일명 갈고리 스킬(?)
이 작품을 처음 봤던 것이 벌써 5년 전이다. 과연 나는 그 때보다 얼마나 성숙해졌을까? 네 번을 봐도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여전하다.
세상이 초록색으로 가득 물들 때쯤, 제주에서 여름/제주 편을 꼭 다시 봐야겠다.
그 때쯤이면 나도 여행의 이유를 조금은 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