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있을 때 전화 좀 줘.”
손톱이 자랄 대로 자라 버려 밑퉁이 없어진 네일아트를 지우러 가고 있었다. 일 할 땐 손가락 살점 위로 조금이라도 자라는 손톱이 보기 싫어 가차 없이 깎았는데 손톱이 이렇게도 자랄 수 있구나. 지저분하게 깨져버린 매니큐어를 보며 휴대폰을 들었다. 친구의 문자였다.
“남는 게 시간인데.”
중얼거리며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깐 핸드폰의 시계를 보고 네일 제거 예약 시간이 10분 남았음을 확인했다. 10분이면 되겠지.
친구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언제나 아기인 줄 알았는데 어엿한 회사를 벌써 삼 년째 다니고 있었다. 작년 봄쯤에 한번 종로에서 만나 밥 한 끼를 먹었다. 친구를 닮아 뽀얀 피부에 앳된 얼굴에서 싱그러움이 비쳤다. 이제 막 휴직을 앞둔 나를 부러워했고, 직장에서의 고충도 토로했다. 그저 사회초년생의 어리광정도로 생각했다. 일 년 정도만 더 다니고 퇴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징글징글한 꼰대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서 그저 들어주는 일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은 건너 건너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들과 새해의 삼월까지 근무를 마치고, 몇 개월 정도는 하고 싶던 여행도 하고 쉬다가 대학원을 가던지 이직을 하던지 하자고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들어 놓은 청년 적금도 3월이 만기이고, 3월이면 딱 3년을 채우니 이래저래 3월이 좋겠다 한 것이다.
친구의 통화 요건은 이랬다. 연말인 며칠 전 이렇게 3월까지 다니자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해놓고 회사에서 근무 중인 동생이 친구에게 전화를 해 오늘 시간 있으면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단다. 친구는 직감했다. 동생이 3월이 아닌 지금 바로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차피 그만 둘 회사이지만 친구는 동생이 계획도 없이 덜컥 바로 회사를 그만두면 집에서 팽팽 놀고 잠이나 퍼질러 잘 것임이 분명하다고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를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나가야 할지 전화를 했던 것이다.
사실, 친구가 왜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휴직하고 집에서 팽팽 놀고 잠이나 퍼질러 자는 나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를 돌리지 않고 친구에게 말하니 친구는 멋쩍은 듯 “그래도 넌 안 그만뒀잖아.”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녀는 왜 그만두겠다고 했을까. 엊그제 철석같이 3월까지 다니겠다고 약속해 놓고. 새해 첫 출근을 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원래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도 더 다니기 싫어지잖아. 이야기 잘 들어보고 마무리 잘할 수 있게 구슬려봐. 근데 오늘 출근해서 무슨 일이 있었나?”
친구는 동생의 이야기를 먼저 잘 들어보겠다고 하고 통화를 끊었다. 이미 예약시간이 2분 정도 지나있었다. 시계를 보고 성급히 네일숍에 들어갔다. 한 달가량 나와 함께 했던 젤네일이 드릴로 갈려 흩어져 없어져가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출근길 버스에 타서야 켜놓은 가스불이 생각나듯 동생의 마음이 이제야 떠올랐다. 그리고 2018년 설 연휴 첫날 숨졌던 고 박선욱 간호사를 떠올렸다. 나는 ‘태움’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좋아할까 싶다마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혹은 조금은 친해졌다는 자리에서 내가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셋에 한 명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실제로 태움이라는 것이 있나요?”라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내가 속한 집단의 치부를 밝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왔다. 본인들은 모르는 것처럼, 당신들은 그런 비슷한 짓을 감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것처럼.
고 박선욱 간호사 관련 기사의 댓글에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백의의 천사라는 말이 무색하다.’ ‘간호사들은 왜 저렇게 자기들끼리 못 잡아먹어 안달일까.’라는 댓글이 너 나 할 것 없이 박혀있다. 태어날 때부터 간호사가 될 사람들은 간호사라고 딱지가 붙어서 태어날까. 태움이 문화라고 불린다는 것부터 기가차지만, 난 태움이라는 것은 비단 간호사 집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느꼈다. 벼랑 끝에 선 저 연차 전공의를 밀어붙이는 윗년차 전공의, 사원이 우울증 약을 먹어가게 하며 출근하게 하는 회사의 대리, 당신의 직원이 다음날 스스로 넥타이 끈을 목에 걸 줄 모르고 해 대는 욕지거리.
기사에 따르면, 한 국립대병원 간호사의 2년 이내 퇴사 비율은 47.9%다. 실로 내가 입사한 부서에서 4명 남짓한 나의 동기들은 이미 다 떠난 지 오래고, 윗년차도, 아랫년차도 그렇다. 우리 엄마조차 이렇게 말한다. 간호사는 수요가 많아 취업이 잘 되니까 잘도 그만두는 거라고. 어느 누가 재취업을 하고 싶어서 그리 그만둘까. 우리가 숨 좀 쉴 수 있게, 우리가 물 한 모금 마시면서 일할 수 있게 해야 당신들도 살 수 있는 거라고 아무리 목이 쉬게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 ‘태움’이라는 입에도 담기 싫은 현상은 개인의 인성 문제로 만은 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간호사라는 집단을 이러한 핑계로 옹호하고 싶지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나부터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탈모가 생기고 한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양 숫자나 세면서 이런 지긋지긋한 고민을 해왔음에도 나는 친한 친구 동생의 고통을 그저 투정으로 치부했다.
그제야 난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생각해보니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다음날 친구는 울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은 몇 개월 전부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입사 때부터 인신공격을 해대는 대리로 인해서. 그 대리 덕에 우리의 동생은 손이 떨려 회사에서의 업무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그 대리에 대해서는 개인의 인성문제로만 보는 나의 편협한 선입견도 문제가 있지만 그저 나는 조금 더 여유롭고 핑계 대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개인의 문제와 구조적 문제의 저울질 사이 한가운데에서 위태롭게 서있는 간호사들과,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