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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글 Jan 06. 2023

지저분한 손톱

 “시간 있을 때 전화 좀 줘.”


 손톱이 자랄 대로 자라 버려 밑퉁이 없어진 네일아트를 지우러 가고 있었다. 일 할 땐 손가락 살점 위로 조금이라도 자라는 손톱이 보기 싫어 가차 없이 깎았는데 손톱이 이렇게도 자랄 수 있구나. 지저분하게 깨져버린 매니큐어를 보며 휴대폰을 들었다. 친구의 문자였다.


 “남는 게 시간인데.”


 중얼거리며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깐 핸드폰의 시계를 보고 네일 제거 예약 시간이 10분 남았음을 확인했다. 10분이면 되겠지.


 친구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언제나 아기인  알았는데 어엿한 회사를 벌써  년째 다니고 있었다. 작년 봄쯤에 한번 종로에서 만나   끼를 먹었다. 친구를 닮아 뽀얀 피부에 앳된 얼굴에서 싱그러움이 비쳤다. 이제  휴직을 앞둔 나를 부러워했고, 직장에서의 고충도 토로했다. 그저 사회초년생의 어리광정도로 생각했다.   정도만  다니고 퇴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징글징글한 꼰대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서 그저 들어주는  밖에는  수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은 건너 건너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들과 새해의 삼월까지 근무를 마치고, 몇 개월 정도는 하고 싶던 여행도 하고 쉬다가 대학원을 가던지 이직을 하던지 하자고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들어 놓은 청년 적금도 3월이 만기이고, 3월이면 딱 3년을 채우니 이래저래 3월이 좋겠다 한 것이다.


 친구의 통화 요건은 이랬다. 연말인 며칠 전 이렇게 3월까지 다니자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해놓고 회사에서 근무 중인 동생이 친구에게 전화를 해 오늘 시간 있으면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단다. 친구는 직감했다. 동생이 3월이 아닌 지금 바로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차피 그만 둘 회사이지만 친구는 동생이 계획도 없이 덜컥 바로 회사를 그만두면 집에서 팽팽 놀고 잠이나 퍼질러 잘 것임이 분명하다고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를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나가야 할지 전화를 했던 것이다.


 사실, 친구가 왜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휴직하고 집에서 팽팽 놀고 잠이나 퍼질러 자는 나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를 돌리지 않고 친구에게 말하니 친구는 멋쩍은 듯 “그래도 넌 안 그만뒀잖아.”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녀는 왜 그만두겠다고 했을까. 엊그제 철석같이 3월까지 다니겠다고 약속해 놓고. 새해 첫 출근을 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원래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도 더 다니기 싫어지잖아. 이야기 잘 들어보고 마무리 잘할 수 있게 구슬려봐. 근데 오늘 출근해서 무슨 일이 있었나?”


 친구는 동생의 이야기를 먼저 잘 들어보겠다고 하고 통화를 끊었다. 이미 예약시간이 2분 정도 지나있었다. 시계를 보고 성급히 네일숍에 들어갔다. 한 달가량 나와 함께 했던 젤네일이 드릴로 갈려 흩어져 없어져가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출근길 버스에 타서야 켜놓은 가스불이 생각나듯 동생의 마음이 이제야 떠올랐다. 그리고 2018년 설 연휴 첫날 숨졌던 고 박선욱 간호사를 떠올렸다. 나는 ‘태움’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좋아할까 싶다마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혹은 조금은 친해졌다는 자리에서 내가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셋에 한 명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실제로 태움이라는 것이 있나요?”라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내가 속한 집단의 치부를 밝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왔다. 본인들은 모르는 것처럼, 당신들은 그런 비슷한 짓을 감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것처럼.


 고 박선욱 간호사 관련 기사의 댓글에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백의의 천사라는 말이 무색하다.’ ‘간호사들은 왜 저렇게 자기들끼리 못 잡아먹어 안달일까.’라는 댓글이 너 나 할 것 없이 박혀있다. 태어날 때부터 간호사가 될 사람들은 간호사라고 딱지가 붙어서 태어날까. 태움이 문화라고 불린다는 것부터 기가차지만, 난 태움이라는 것은 비단 간호사 집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느꼈다. 벼랑 끝에 선 저 연차 전공의를 밀어붙이는 윗년차 전공의, 사원이 우울증 약을 먹어가게 하며 출근하게 하는 회사의 대리, 당신의 직원이 다음날 스스로 넥타이 끈을 목에 걸 줄 모르고 해 대는 욕지거리.


 기사에 따르면, 한 국립대병원 간호사의 2년 이내 퇴사 비율은 47.9%다. 실로 내가 입사한 부서에서 4명 남짓한 나의 동기들은 이미 다 떠난 지 오래고, 윗년차도, 아랫년차도 그렇다. 우리 엄마조차 이렇게 말한다. 간호사는 수요가 많아 취업이 잘 되니까 잘도 그만두는 거라고. 어느 누가 재취업을 하고 싶어서 그리 그만둘까. 우리가 숨 좀 쉴 수 있게, 우리가 물 한 모금 마시면서 일할 수 있게 해야 당신들도 살 수 있는 거라고 아무리 목이 쉬게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 ‘태움’이라는 입에도 담기 싫은 현상은 개인의 인성 문제로 만은 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간호사라는 집단을 이러한 핑계로 옹호하고 싶지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나부터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탈모가 생기고 한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양 숫자나 세면서 이런 지긋지긋한 고민을 해왔음에도 나는 친한 친구 동생의 고통을 그저 투정으로 치부했다.


 그제야 난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생각해보니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다음날 친구는 울면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은 몇 개월 전부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입사 때부터 인신공격을 해대는 대리로 인해서. 그 대리 덕에 우리의 동생은 손이 떨려 회사에서의 업무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그 대리에 대해서는 개인의 인성문제로만 보는 나의 편협한 선입견도 문제가 있지만 그저 나는 조금 더 여유롭고 핑계 대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개인의 문제와 구조적 문제의 저울질 사이 한가운데에서 위태롭게 서있는 간호사들과,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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