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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글 Dec 05. 2022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몰타는 이상한 나라다. 처음 간 카페에서 같은 음료를 시켰다는 이유로 한시간 내리 수다를 떨다가 “저녁에 바다 수영 할래요?” 한마디에 각자 와인 한 병을 챙기고 해변 한가운데서 만난다. 이상하게 한국처럼 네이버지도를 공유하지 않아도 ‘여기서 보면 되겠지’ 하고 기다리면 거기서 다 만난다. 와인을 홀짝거리며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부족한 영어로 한참 늘어놓는다. 꼭 반 병정도 마시고 나면 해질 녘이 되는데 그때 즈음 수영복 위에 걸친 티셔츠 한 장을 훌러덩 벗고 취기 오른 내 볼처럼 불그레한 노을을 담은 바다에 뛰어들어간다. 바다가 우리를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하늘이 장엄한 붉은색을 띄고 마침내 어두워지면 약속한 것처럼 조용히 짜디짠 바닷물 위에 동동 떠서 쏟아지는 별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이렇게 만난 친구들이 있다. 한국을 좋아하고 수줍음 많은 프랑스 친구 엠마, 배려심 많고 야무진 일본인 친구 스즈키, 모델 같은 체형에 무엇이든 적극적인 한국인 친구 재이. 사실 나는 이 친구들을 포함해 몰타에서의 인연에 대해 아주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해외에서 만난 인연을 오래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가벼운 내 마음이 무거워지게 된 날이 있었다.


 엠마가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 함께 세인트줄리앙의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슬리에마에서 버블티를 마시기로 했다. 오랜만의 건전한 모임에 나는 순간 초등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설레기까지 했다. 스즈키를 제외하고 먼저 햄버거 집에서 만난 엠마와 재이, 그리고 나는 배가 너무 고팠던지라 각자 주문을 쏜살같이 마치고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오는 스즈키를 기다리느라 햄버거를 앞에 두고 먹지 못하는 시간은 영겁과 같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려 하는 시점에 스즈키가 나타났다. SES시절 유진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 스타일의 스즈키가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잖게 걸어왔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외치고 주문을 하러 갔다. 우리는 참지 못하고 전투태세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특히 엠마는 배가 많이 고팠던지 치킨 버거, 치킨 너겟을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그녀의 오빠가 UFC 선수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나도 버거를 한참 입에 쑤셔넣고 나서야 잃었던 이성을 슬슬 되찾았다. 그제서야 엠마의 스타일링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트레이닝 복을 입고 다니던 엠마는 타이트한 스키니 진과 크롭티를 입었다. (멋진 몸매 덕에 나이키 티셔츠만 입어도 간지나는 그녀였다.) 양 갈래로 높게 묶은 머리스타일 덕분에 그녀의 풍성한 곱슬머리와 평소 내가 좋아하던 그녀의 주근깨가 더욱 사랑스럽게 보였다. 누가 봐도 힘을 준 메이크업까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친구들과의 이번 만남을 그녀가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녀의 스타일링 감상을 마칠 때쯤 엠마는 갑자기 자꾸 바지춤을 여미고 불편한 듯 배를 만지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부르구나 생각했다. 그러다가 안되겠는지 엠마는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근처를 조금만 걷다가 오겠다고 했다. 엠마는 혼자 다녀오겠다 했지만 언제나 걱정이 많은 재이가 동행해주었다.


 몰타는 언제나 햇빛이 강하지만 그 날은 유난히 햇빛이 따가웠다. 야외테이블에 앉은 탓에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참지 못하고 스즈키와 나는 실내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스즈키가 햄버거를 먹는 동안 나는 8살이나 차이 나는 그녀에게 여전히 늘지 않는 나의 영어실력을 한탄하고 있었다. 어른스러운 그녀는 어느때처럼 나를 다독이다가 잠시 스마트폰을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엠마가 옆에 있는 영화관 건물 화장실에서 토를 하고 있대. 햄버거에 견과류나 깨가 들어가 있던 게 아닌지 확인해달라고 재이에게 연락이 왔어.”


 엠마는 견과류와 깨 종류에 알레르기가 있어 먹지 않는다. 스즈키는 먹고 있던 햄버거를 던지다시피 버려둔 채 직원에게 가 견과류나 깨가 들어가 있거나 주방에서 함께 보관하는지 물었다. 직원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의심스러웠지만 주방 안에 들어가 샅샅이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엠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영화관에 들어서자마자 엠마가 있는 곳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0층의 여자화장실 주변은 입구부터 어수선했다. 누군가에게 통화하고 있는 영화관 직원, 다급한 재이의 목소리, 구역질 소리가 섞인 엠마의 흐느낌,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발소리. 화장실에 들어가니 변기를 부여잡고 있는 엠마의 뒷모습과 혼란스러워하는 재이가 보였다. 우리는 햄버거 가게의 직원이 엠마의 햄버거에 견과류와 깨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음을 전했다. 직원들은 엠마를 부축하며 구급차를 부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엠마는 거부했다. 이유는 엄마의 귀에 들어가면 혼날 것이라는 것이다. 아뿔싸. 마치 응급실에서 일을 다시 하고 있는 착각에 휩싸였다.


 응급실 간호사에겐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 응급실에서 환자를 분류할 때 “경력이 많은 간호사의 육감”이라는 항목이 존재한다. 그만큼 간호사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많진 않지만 짧지도 않은 나의 경험에 기반하면 환자가 알레르기로 인한 구토 증상을 보인다면 아나필락시스에 준해 응급처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의 직감은 엠마가 알레르기로 인해 구토를 하는 것 같진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타이트한 옷, 배가 고파 급하게 햄버거를 먹은 점, 구토가 지속적이 아니라 일회성으로 끝난 점, 구토 이외에 다른 증상이 없는 점. 그리고 평소 불안이 많은 엠마는 이미 햄버거에 깨가 들어가 있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불안도 한 몫 했으리라 짐작했다. 일단 엠마를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구토가 멎은 뒤 배려심 많은 직원들과 함께 엠마를 데리고 1상영관과 2상영관 사이의 소파에 눕혔다. 바지 단추를 풀러 주고 겉옷으로 덮어 주었다. 불안해 할 때 마다 심호흡을 함께 해줬다. 조금만 더 상황을 보다가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병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십 여분쯤 흘렀을까. 호흡도 일정 해지고, 진정이 된 엠마는 갑자기 우리를 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남은 시간 너희와 버블티 먹으며 좋은 시간 보내고 싶었는데 너무 미안해.” 이 와중에 버블티 생각을 한 엠마가 웃기고 귀여워 웃음이 살짝 나왔지만 잘 참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스즈키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그런 말 하지마.” 하며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했지만 다들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 놀랬을 거라 짐작했던 터라 스즈키를 다독였다. 그래도 엠마가 진정이 된 탓에 우리 모두 안심하는 눈치였다. 한숨 돌리자 이제는 쇼파 팔걸이에 앉아있던 재이가 눈에 들어왔다. 피곤해 보이다 못해 핏기가 없는 얼굴이었다.


“재이, 괜찮아? 집에 먼저 들어가. 우린 정말 괜찮아.”

“아니야,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 엠마가 집에 가면 나도 갈게.”


 얼굴이 수척해 보여 팔걸이에서 내려와 쇼파로 앉히고, 급기야 엠마는 재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대신 쇼파에 누우라고 했다. 몇 분 사이에 환자가 한 명 더 생겼다. 한사코 거절하던 재이는 쇼파에 앉아 무언갈 말하려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갑자기 아이처럼 엉엉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화장실에 가는 사람들 모두가 울음 바다가 된 우리를 한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사실, 나 남자친구랑 요즘 문제가 있어.”


 처음 사귄 외국인 남자친구. 매일같이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 영어가 늘지 않는 스트레스. 낯선 곳에서의 응급상황. 그리고 재이는 엠마와 줄곧 같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긴장을 놓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풀린 것이다. 사실 그녀는 0층 화장실에서부터 나에게 두통을 호소했었다. 쌓이고 쌓이다가 터져버린 것이다. 연애 상담을 하기엔 나의 영어가 턱 없이 부족했다. 엠마와 스즈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연애는 어쨌든 내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을 나는 알기에 보통 나는 들어주는 편이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조언을 구했다.


“꼰대 같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닐 수도 있어. 지금 당장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맥 빠지는 조언이었지만 고맙게도 재이는 많이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결국 엠마는 병원에 가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집에 가는 길에 버블티를 사가고 싶다는 그녀를 보며 응급실에서의 진상 환자가 생각나 화가 날 뻔도 했지만 귀여워서 봐주기로 했다. 스즈키도 진정이 됐는지 배가 고프다며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갔다.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바다 수영을 같이 가는 것처럼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헤어졌다. 하지만 엠마가 떠난 후에도 우리끼리 만나면 그 날 이야기를 했다. 눈물은 참 이상하게 남에게 한 번 보이기가 어렵지 그 뒤로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한번 눈물을 보이면 그 누군가와 전과는 다른 관계가 되어 버린다. 마치 “우리 그 전에 서로의 눈물 본 사이잖아, 그치?” 하는 것처럼. 눈물이란 그저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일 뿐 인데 말이다. 서로의 눈물을 봐 버린 그 때의 추억 하나로 우리는 다른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을 생각하는 가벼웠던 내 마음도 그때 친구들이 흘린 눈물만큼 무거워졌다. 몰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 했던 내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지만 이런 차질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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