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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글 Dec 23. 2022

전화하면 안 되는 사이

남매, 그 불편한 관계

붕- 붕-

진동소리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섬찟한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뭐지? 왜 전화했지? 누가 아픈가?'


근심 가득한 마음으로 통화버튼을 누르며 자동반사적으로 물었다.


"왜?"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되물었다.

"어?"

"아니, 무슨 일이야?"


헛웃음을 치며 그는 말했다.

"야, 전화받자마자 왜라니. 오빠가 동생한테 이유가 없으면 전화하면 안 되냐?"


그렇다. 그는 우리 엄마의 아들이자 우리 집 금쪽이, 나의 네 살 터울의 오빠였다. 우리 남매가 통화를 하게 되는 경우는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거나 누구에게 부탁하기 쫌스럽고 불편한 것을 부탁하거나 둘 중 한 명이 술을 거나하게 했거나 이 세 가지 중 하나였다. 그 세 가지 선택지에서 벗어난 안부 전화라니. 당황스러웠다.


오빠는 내가 태어난 이후의  기억에서부터 나를 괴롭혔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엄마의 말에 의하면 오빠는 어느 날 신생아인 나를 머리에 베고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악독하게 괴롭히기엔 다소 유약했다. 우리  남매는 4.0kg 이상의 몸무게로 태어나 엄마를 부끄럽게 했지만 그의 출생 시 몸무게가 더욱 부끄럽게도 자주 골골댔다. 감기란 감기는 죄다 걸렸으며 심성도 어찌나 유약했는지 아파서 병원에 가면 흰색 옷만 입은 사람을 보면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분리불안도 있었는지 내가 엄마의 다리 밑에서 나올 때도 철옹성 같은 의료진의 제지를 뚫고 엄마를 찾아 분만실에 들어왔다.


지금의 오빠 친구들이 들으면 믿지 못하겠지만 믿지 못할 일이  있다. 오빠는 초등학교  무려 전교 회장에 당선됐다. 먹고살기 바빠 자식들의 학교 일에 관심을 두지 못했던 우리의 엄마와 아빠는 도통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인기투표였을까. 현재로서 도무지 믿기 어렵지만 오빠는 인기가 많았다. 우리   골목에는 "OOO 바보"라는 낙서와 "XXX 사랑해"라는 낙서가 혼재되어 있었다. 사랑해의 대상은 언제나 오빠였고, 바보의 몫은 십중팔구 나였다. 상술 섞인 기념일마다 오빠는 그녀들의 러브레터와 선물들을 가방이 넘치게 가져왔으며 오빠가 고래를 잡는 날도 위로차 소녀들이 병문안을 왔었다. 더불어 오빠는 운동을 잘해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체육중학교와 유소년 축구 코치들의 스카우트 제의 덕분에 우리 가족은 소고기도 많이 얻어먹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기투표와 같은 초등학교 회장선거에서 당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추론이다.


하지만 그는 모범적인 전교회장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아빠의 식도에 고량주가 들어가면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야 인마, 너 그때 무릎 꿇기로 약속해놓고 왜 안 지켰냐?"


 바야흐로 오빠의 전성기였던 초등학교 6학년, 전교회장 시절, 그는 부모님이 교무실에 발을 들이게 했다. 표창장 수여와 같은 일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일로. 엄마의 회상에 의하면 오빠의 담임 선생님이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20대 여선생님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한테 울면서 전화를 했겠느냐고."


사건의 전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오빠의 잘못은 명명백백 분명했다. 그렇게 우리의 부모님은 교무실로 불려 갔다. 부모님이 학교에 가기   부자간에 사전에 맺어진 약속이 있었다. "교무실에 가면 아빠는 선생님께 무릎을 꿇을 거야. 그럼 너도 같이 꿇는 거야. 알겠어?" 오빠는 아빠에게 먼지 나게 맞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아빠는 약속대로  "죄송합니다."  한마디와 함께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황하고 놀란 선생님은 어쩔  몰랐다. 아빠는 뒤통수에 달린 눈으로 오빠를 보고 있었다. 오빠가 무릎을 꿇어야 일어날  있었다. 하지만 오빠는 끝끝내 무릎을 꿇지 않았다.  생각엔 아마도 그날 아빠에게  맞았던지 싶다.


비록 그는 그날 무릎을 꿇지 않았어도 6학년 5반에서 가장 오래도록 선생님께 안부를 전하는 제자가 되었고, 선생님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졸업하고 십 년이 넘도록 개학 전날인 3월 1일에 언제나 오빠는 동창들을 데리고 선생님에게 갔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을 닮은 체육교사가 되겠다는 다부진 꿈을 가지고 무럭무럭 성장했다.


아빠의 반대로 체육고등학교가 아닌 일반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고, 그의 샤프에는 그가 원하던 사범대학의 로고가 붙여졌다. 매일  자국보다는 땀냄새를 풍기던 오빠는 3학년이 되면서 짐짓 진지하게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주일에 세 번은 야자 대신 체육입시학원을 다녀왔다. 지금은 상상할  없지만 오빠의 배에는 빨래판이 선명해졌고 심심하면  엉덩이를 차는 오빠의 발길질 강도가 하루가 다르게 거세졌다. 매일 드는 바벨과 샤프로 인해 그의 손바닥과 손가락엔 굳은살이 배겼다. 수능을 봤고, 원하던 학교에 가고도 떡을 치는 점수였다. 엄마는 가능한 많은 대학에 원서를 넣자고 했지만 그는 원하던 학교, 원하던 학과  개에 정시 지원을 했다. 소신 지원이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수능이 끝나면 모든 예체능 학원에서는 실기 연습에 불을 지핀다. 오빠도 도시락을 싸가며 주말에도 나가 운동을 했다. 학원 선생님들도 오빠는 당연히 붙을 거라 단언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엄마는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오빠는 방에서 불을 끄고 누워서 나오지 않았다. 다음  오빠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학원에 가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재수 생활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는 놀기 위해 재수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지금도 거기에서 인생 친구를 사귀었다고 하니 그거면 되었다. 심지어 나도 재수를 해보고 싶다 생각이  정도였다. 그렇게 재미지던 재수 학원 생활이 끝나고 그는 또다시 수능을 봤다. 엄마의 끈질긴 잔소리 속에도  소신지원을  오빠가 참으로 대단하다 생각했다. 이후 시작된 그의 실기 연습도 순조로운 듯했다.


오빠의 실기 연습이 한창이었다. 나는 원이 끝나고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지름길로 향했다. 지름길엔 공터를 지나가야 했다. 꽁꽁  손을 잠바 주머니에 넣고 종종거리며 친구에게 가고 있었다. 반대편 멀리서 절름발이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였다. 오빠가 허벅지까지  깁스를  채로 목발을 짚으며 오는 모습을 보자 나조차 심난해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앓아누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했다. 정면에서 마주친 오빠를 보자마자,


"오빠, 어떡해?"

"뭐가."


오빠는 저따위 대꾸만 하고  지나쳐갔다. 오빠가 지나쳐  공기 속에서도 오빠의 심란한 마음이 전해졌다. 시험  날까지 엄마는 오빠의 멱살을 잡고 수차례 병원과 한의원을 다녔지만 그의 햄스트링 파열은 끈질기게도 그를 놔주지 않았다. 오빠는 실기 시험 , 깁스를 풀고 시험장에 갔다. 오빠는 그렇게 근육이 찢어진 채로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는 예비 1번이었다. 엄마는 매일 묵주기도를 하며 기도를 했다. 우리 가족 모두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 학과 합격자들의 또 다른 합격을 위해.    학교의 체육교육학과 합격자는  한 명도 입학취소를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만 있는 오빠를 대신해 엄마는  대학의 경영학과에 몰래 지원을 했다. 나는 오빠 정도에 과분한 학교라며 농담 섞인 축하를 건넸지만 오빠는 웃지 않았다.  학기를 다니고 군대를 갔고, 제대    없이 복학을 했다. 그래도 그중에 오빠가 무사히 학교를 마칠  있었던  그가 사귄 숱한 여자들 덕이라고   있겠다. 특히 내가 생각하는 오빠의 첫사랑이 그랬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빠의 첫사랑은  언니였다. 눈이 오는 , 오빠는 그의 첫사랑과 어떻게 맺어졌는지 침을 튀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오빠의 흥분한 마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애써 더욱 궁금한 척하며 들었다. 사랑에 풍덩 빠져버린 사람의 눈은 저런가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 소망하건대 이제는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분과 교제하고 있는 오빠는 여전히 가끔 철이 없지만 이래서 오빠인가 싶을 때도 있다.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나보다 먼저 부모님을 챙길 때, 머리로 계산하는 쪼잔한 나와는 다르게 아무 생각이 없을 때, 흥분하는 나를 진정시킬 때.


오빠와의 추억을 써보려고 시작한 글이었는데 어느새 오빠가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너무나 능청스러워져 버린 오빠를 보며 오빠는 그때의 옛날 일을, 우리의 일을 나처럼 이렇게 가끔 생각할까 궁금해한다. 그리고 오빠가 술에 취해서 했던 약속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기는 절대 맏이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부모님의 재산을  갖지 않을 거라고.  공평하게 나누겠다고 했던 본인의 말을. 반드시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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