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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Jan 24. 2024

[시골 쥐의 서울 생활] 02. 계절학기 - 첫 날

과거의 나를 돌아볼 수 있었던, 짤막한 연세대학교 학점교류 이야기

# 2023. 12. 26.


 계절학기 개강이 다가왔다. 내가 듣는 수업의 제목은 '아동 및 청소년 상담'. 우리 학교 동기들은 죄다 '영화의 이해', '서양철학사' 같은, 학교에서 일명 꿀교양으로 소문난 수업을 대부분 듣는 데 반해서 나는 이름도 분야도 생소한 '상담'에 대해 다루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사실 서울까지 올라와 수업을 듣는 흔치 않은 기회인데, 다른 아이들이 다 듣는 과목을 듣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수업을 듣고자 이 과목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


 - 라는 모양 그럴싸한 스토리로 포장을 한번 해 보았다. 사실은 학기 중에 열린 연세대 수강신청에 실패해서 그렇다. 아침 8시에 수강 신청이 열렸는데, 전날 공부인지 뭔지 무리를 하다가 결국 일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아침 수업에 가 뒤늦게 다른 아이들 소식을 찾아보니 앞서 말한 '영화의 이해', '서양철학사' 같은 인기 강좌들을 이미 잡은 뒤였고, 당연히 자리는 동이 나고 없었다. 그렇다고 계절 수업을 안 들을 수야 없으니 남는 강좌들을 찾아보았다. 우리 학교에서 교양 선택으로 인정되는 과목 중에서, 아침에 진행되는 것들을 추려보니 이 과목, '아동 및 청소년 상담'이 대기 순번이 가장 빨랐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신청할 순 없어서, 수업 계획서를 살펴보았다. 웬걸? 꽤 흥미로웠다!


본 과목을 통해서 ... 아동/청소년기의 다양한 성장 사례들을 이해하여, 회상된 자신의 아동/청소년기의 기억들을 성찰할 수 있다. 그리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아동/청소년들을 상담할 수 있다.


 수업 계획서에 나온 수업 목표에서 흥미를 느꼈는데, 바로 '자신의 아동/청소년기의 기억 성찰'이라는 부분에서였다. 가끔씩 할 것 없이 책상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때로는 옛날 생각이 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녹록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사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릴 적의 가족사부터 커서는 친구관계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실수들, 시행착오들을 겪으며 우울하기도 했고, 울기도 했던 것이 우리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런 옛날 얘기들을 평소에 생각하며 왜 그랬을까, 되짚어 볼 때 증명된 이론이 아닌, 일명 내 뇌피셜에 기반하여 옛일을 분석해보곤 했다. 그런데 이 과목에서는 실질적인 심리학, 즉 우리의 사고 방식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배우고 이에 기반하여 과거를 성찰해본다니, 뇌피셜에만 의존하다가 우울한 생각으로 수도 없이 빠졌던 과거에 비하면 매우 건강한 성찰이 아닐 수 없다.


 

수업 첫째 날 아침 등교하면서 찍은 풍경들. 왼쪽은 집 근처의 풍경이고 오른쪽은 버스에서 내려 찍은 모습이다.


 첫 날의 아침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다. 그 설렘 덕택에 아침 7시에는 하등 일어나본 적도 없는 녀석이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기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경건하게 샤워를 하고 나갈 채비를 한 뒤, 곧장 집을 나섰다. 준비하는데 까지는 생각보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학교까지는 네이버 지도를 보고 따라갔는데, 서대문우체국 앞에서 내리라길래 서둘러 내리고 보니 시간은 8시. 수업 시작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초행길이라 얼마나 걸릴 지 몰라 열심히 걸었다. (아, 그 전에 핫바 하나와 우유 한 팩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갔다. 열심히 수업 들으려면 에너지가 있어야지, 암.)


  연세대 정문으로 가는 길로 지도가 안내하지는 않아서, 원룸가 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으로 걸어갔다. 꽤 익숙해 보이면서도 낯선 풍경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연세대 서문까지 걸어갔다. 중간에 지도가 너무 골목길로 안내하길래 '여기가 길이 맞나?' 하고 갸우뚱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골목길은 사람들이 많이 쓰는 지름길이어서 놀라기도 했다.


 수업이 열리는 신학관까지 걸어가는 길은 꽤나 멀었다. 패딩을 입은 등에 땀이 좀 나는 정도였다.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엥, 8시 반이 채 되지 않았다. 첫 날의 데이터로 이제 기상 시간과 집에서 나오는 시간을 조절하면 되니, 나쁘진 않은 시행착오라 해둘까.


텅 빈 강의실. 왠지 모르겠지만 책상이 양쪽으로 밀려 있었다. 대충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의실은 꽤나 평범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들어오고, 교수님까지 오신 뒤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날이니만큼 가벼운 얘기와 학생들의 자기소개로 시간이 채워졌다. 자기소개로 세 가지 정도 공통 질문을 주셨는데, 최근 나를 가장 크게 웃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 강의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가 그것이었다. 나를 가장 크게 웃게 한 건 아무래도 최근에 만난 형이라고 답했고,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서울 생활'이라고 답했다. 이 과목에서 얻고 싶은 건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담백하게 마무리.


 자기소개 시간에 출석 명단을 화면에 띄우시고 하나하나 호명하셨는데, 웬걸 우리 학교 사람들도 꽤 있었다! 23학번이 나 포함 세 명, 21학번 선배님 한 분 이렇게 명단에 있었는데, 남자 동기 한 명과 선배님은 출석하지 않으셨다. (이후에도 계속 안 나오신 걸로 보아 수강취소한 듯하다.) 그래서 나머지 동기 한 명의 자기 소개를 들어봤는데, 또 웬걸 같은 울산 출신이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그러나 내향적인 내 성격과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이 맞물려 그 동기와 말을 섞어보지는 못했다. 이외에 특이한 점은 서울대 아동가족학과에서 여기로 계절학기 들으러 오신 분이 계셨다는 것, 중국인 유학생 분도 계셨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아니 근데 6,900원에 저 양은 너무하지 않나... 저 식판 받아들자 마자 육성으로 '엥?' 소리가 나왔다.


 모처럼 계절학기를 왔으니 연세대 학식을 한 번 먹어봐야 하지 않겠나. 학식 식당을 찾으려는데 어느 건물에 있는지 잘 몰라서, 우선 우리 학교처럼 학생회관에 뭐라도 있겠지 하는 마음에 학생회관으로 들어갔다. 옳거니, 식당이 있었다. 메뉴가 우리 학교보다 훨씬 많아보였고 종류도 다양했다. 고기가 땡겼던 나는 삼겹 뭐시기 구이라고 쓰여진 메뉴를 시켜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별로였다. 위의 사진에 나와있다시피 고기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목살과 삼겹살이 섞여 있어 맛이 크게 좋지는 못했다. 룸메 형한테 들었던, 연세대 학식 맛없다는 말을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이야.


 어찌저찌 끼니를 떼우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펼쳐지는 캠퍼스 풍경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었다. 우측으로는 큰 공학관 건물들과 중앙도서관, 좌측으로는 세브란스 병원 건물이 나를 압도했다. 뒤쪽으로는 언더우드관이 이들과는 사뭇 다른 멋을 뽐내며 서 있었다. 좁은 캠퍼스에만 갖혀 살다 넓은 캠퍼스로 나오니 촌놈 티를 안 낼수가 없더라. 특히나 하교하면서 보이는, 신촌 굴다리 위로 지나가는 기차들은 낭만을 더해준다.


경의선 신촌역의 모습. 기차역으로서의 신촌역 규모에 비해 역사가 굉장히 크다.

 

 하교할 때에는 버스 정류장도, 2호선 신촌역도 아닌 경의선 신촌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좌역부터 갈라져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경의선상에 놓인 신촌역은, 한 시간에 한 대정도 열차가 서는 한산한 역이다. 신촌역 대합실에서부터 안내판에는 '우리 역은 열차가 드물게 서는 역입니다' 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주변 전철역을 안내해주고 있을 정도다. 경의중앙선 전철 본선과는 갈라져 홀로 서울역으로 향하는 노선이 나에게는 인상깊게 다가온다.


 신촌역 입구에는 옛적에 사용했던 역사(驛舍)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이 그의 시 「사랑스런 추억」에서 읊은 구절에 신촌역이 나오기도 한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꼬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이 구절의 '쪼꼬만 정거장'이 신촌역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쪼꼬만 정거장'으로서의 신촌역과 달리 역사 자체의 규모는 매우 크다. 연세대와 이화여대의 상권을 노린 것인지 큰 규모의 민자역사가 들어와 있는데, 정작 신촌역 출입구에서 바라본 민자역사 건물은 매우 스산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공실률이 무려 100%에 달한 적도 있다고 한다. 민자역사의 투자를 받을 당시에 신촌역을 '기차가 무려 288회나 다닌다' 라며 광고를 했다고 하는데, 정작 당시 하루에 서른 몇 대 정도만 정차하는 작은 역임에도 과장 광고를 한 것이다. 사실 신촌역에 정차하는 열차 말고, 서울역과 용산역에서 운행을 시작하고 끝마치는, 그래서 신촌역을 통과하는 무궁화호, 새마을호나 KTX를 따졌을 때에 틀린 말은 아니기에 더욱 헛웃음이 나오는 대목인데, 이러한 이유에서 민자역사의 상가들은 적은 유동인구 탓에 모두 폐점하고 없는 것이다.


나의 서울 생활을 넉넉하게 해준 고마운 에어팟 맥스. 대체 어떻게 당첨된건지 아직도 돌이켜보면 어안이 벙벙하다.

 

 저녁에는 룸메 형과 장을 보러 다녀왔다. 안그래도 식생활이 가장 걱정이라 아침에 먹을 시리얼, 밥 해먹을 쌀과 가끔씩 귀찮을 때 먹을 라면, 간식거리를 장만해야 할 참이라 형을 따라 나섰다. 가는 김에 학기중에 당첨된 에어팟 맥스도 당근했다. 정가로 무려 75만 9천원인 녀석을 65만원에 팔았다. 안 그래도 본가에 왔다갔다 할 교통비 때문에 허덕이던 참인데, 덕분에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기분이 좋은 참에 원하는 것들을 이것저것 마트에서 골라 담았다. 4킬로그램짜리 밀폐형 팩에 든 쌀과 밀키트 두 개, 간식으로 몽쉘 정도를 샀다. 반찬거리도 좀 살까 했는데 엄마가 집에 오면 따로 해 주신대서 여기서 사지는 않았다.


 여기까지가 첫 날의 하루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취하는 학생으로서의 생존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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