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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씨 Jan 05. 2024

잊고 있던 노래

엽서 같은 기억

예고 없이 찾아오는 기억의 파편은 갑작스럽긴 하지만 반갑다. 그 순간의 행동이나 생각, 감정 등과 연결고리 하나 없이도 갑자기 떠오르는 장면, 사람, 노래, 마음. 아마도 EMI 음반이었던 것 같은, 아마도 고흐의 '씨 뿌리는 남자'가 앨범 재킷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 같은, 아마도 '포스터의 미국 민요' 비슷한 제목이었던 것 같은, 그런 앨범이 갑자기 떠올랐다. 좀 더 정확히는 포스터의 미국 민요 '금발의 제니'의 첫 소절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들은 지 최소 25년은 될 텐데. 사람의 기억은 대체 어떻게 폴더 정리가 되어 있는 건지.


그러고 보니 거실에 늘 음반이랑 스테레오 시스템이 있었구나.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TV와 연결해 영화의 한국어 더빙 대신 원어를 스피커로 들을 수도 있었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진공관 앰프도 있었다. 아빠는 데카 라벨의 클래식 앨범이랑 가곡 앨범을 갖고 계셨다. 거실에 노래 틀어놓는 걸 좋아하셨고 지금도 그렇시긴 하다.


노래가 떠올라 찾아서 들어보고, 이참에 포스터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고, 흐릿한 기억을 끌어모아 어떤 앨범이었나 검색해보기도 하고 (찾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다른 의문을 느꼈다: 아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앨범을 고르고 사셨을까, 하는. 음악 감상이 취미셨을까, 하는. 아빠는 테니스랑 탁구랑 배드민턴 같은 운동을 잘하시고. 영화 보는 것도 그럭저럭 좋아하시고. 카메라도 몇 개 있었던 것 같고. 책도 종종 읽으시고. 낚시도 가셨던 것 같고. 여행도 좋아하셨던 것 같고. 카세트테이프로 중국어 배우시는 걸 옆에서 같이 배우기도 했었고. 집에 큰 어항이 있었던 적도 있었고. 물건 조립하고 고치고 해체하는 것도 좋아하시고. 이렇게 쓰고 보니 때에 따라서 시절마다 각기 다른 취미가 있으셨던 거 같은데 누가 내게 아빠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과연 정확하게 답할 수 있을까? 물론 아빠도 내 취미는 정확히 모르시겠지만.




요즘 본가에 갈 때는 부모님의 일상적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놓곤 한다. (인터넷에서 누가 올린 꿀팁 덕분이다.) 앞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생각이 배경처럼 깔려 있다. 요즘은 백세인생 시대라니까 앞으로 최소 20년은 남았다는 말을 해본다. 그 이후는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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