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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씨 Mar 29. 2024

마감일을 지키지 못한 이들

어쩌다 이런 일

카피 번역 프로젝트 매니저였던 시절, 전 세계 프리랜서 번역가, 카피라이터, 교정자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일을 잘하고, 마감을 엄수하며, 답장을 잘하는 분들 중엔 하루에도 여러 번 연락을 하게 되는 고정멤버 같은 분들도 있었다.


여행 중 생각이 났다며 사무실로 엽서를 보낸 도 있었고 런던에 온 김에 사무실에 들렀던 분, 신혼여행을 왔다기에 짤막하게 시내 구경을 같이 한 분도 있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이 두 이다.




우크라이나에 사는 러시아어 번역가 K님. 브리핑 문서를 보냈는데 컨펌도 하지 않고 이틀 정도 연락이 되질 않아 여러 번 메일을 보낸 끝에 결국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앞으론 다른 사람에게 보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나중에 답장이 왔다. 최전선에 있던 남편이 뜻밖의 휴가를 받아 갑자기 돌아왔다고. 먹을거리가 부족해 찾으러 다니느라, 그리고는 돌아온 남편과 지내느라 메일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고.


나한테는 일개 프로젝트가 늦어진 거, 일이 좀 틀어진 거에 불과하지만 그 사람에겐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남편과의 시간이었다. 메일 너머의 삶, 일 너머의 일상, 바다 건너의 생활상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모니터 밖을 인지하며 지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태리어 번역가 M님. 에이전시 두 개를 거치는 동안 내내 같이 일한 카피라이터였다. 처음 같이 일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답장을 엄청 빨리 하는데 한 마디로 컨펌을 하곤 가벼운 농담과 웃는 얼굴 :)으로 이뤄진 짧디 짧은 메일을 보내는 걸로 사무실에선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가 초본 카피를 쓰면 파트너 상성이 좋은 다른 카피라이터 D가 감수를 했다. VO 리코딩을 할 때는 둘 중 한 명이 성우 디렉팅을 했다. 협업을 잘하는 이 콤비에게 여러 일을 맡겼다.


아마 한창 연말 캠페인이 진행 중이었을 때였을 것이다. D에게서 메일이 왔다. 사고가 났다고. 그가 많이 다쳤고 좋지 않다고. 아내가 연락을 해왔다 했다. 그렇게 끝이었다.


D가 초본 번역을 맡았다. 감수를 할 사람을 찾았다. 일이 좀 지연된 이유를 클라이언트에게 설명했다. 프로젝트는 기한 내에 마무리되었다.

같이 일하던, 그를 알던 옛 동료들을 만나면 말을 했다. 그가 갔다고. 그의 링크드인 프로필은 아직 남아있다. 4년도 더 전 일인데 가끔 생각난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내게는 직장 동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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