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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씨 Jun 13. 2024

'존재하지 않는 OO입니다'

덤을 줄이는 인생


인간이기에 어김없이 현혹되고야 만다: 엄청난 변화를 줄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완벽한 아이템이 있다는 환상에. 그리고 그것이 삶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달라졌으면 하는 현실, 바라는 이상에 다다르게 해 줄 거라는 헛된 꿈에. 그런 판타지 소설/게임 속 아이템 같은 건 세상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 공간에 딱 맞는 가구를 사면... 나만의 유니폼으로 삼을 만한 착장을 발견하면... 일상 루틴을 이러저러하게 바꾸면... 그러면 삶이 180도 바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물론 삶의 질이 (어느 정도) 오르고 일상에 작은 기쁨이 더해지긴 하겠지만, 시간이 문제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필요와 취향이 바뀌고 물건은 낡고 상하고 망가지며 그와 동시에 내 몸과 상태와 인생과 일상도 달라진다. 모든 것은 한때뿐이라. 


(애초에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눈화장만 했다 하면 눈 언저리가 판다처럼 변하는 사람이 튜빙 마스카라라는 게 존재한단 걸 듣고 이걸 사나 마나 몇 주 간 고민했기 때문입니다.)(글 쓰기 시작할 무렵엔 화장품을 끝까지 잘 쓰는 경우가 드물어 사나 마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제는 샀습니다. 정말 안 번지네요. 계속 잘 쓰면 좋겠죠.)

 



리빙포인트: 효과 좋은 스킨케어 제품을 찾고 싶으면 구글에서 'holy grail skincare'를 검색하면 편리합니다.


잡지나 블로그, 커뮤니티에서 기적 같은 효과를 본 (혹은 기적 같은 효과를 봤다고 광고해야 하는) 추천템을  일컬어 '성배(holy grail)'라 부른다는 게 떠올랐다. 세상 여러 전설 중에서도 떡밥 중의 떡밥인, 그 누구도 손에 넣지 못한 사기템 성배, 아서왕  전설에서 기사들이 인생을 걸고 찾으러 갔던 바로 그 성배. 성배처럼 여겨지는 전설템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고난과 역경(다시 말해 시간과 돈)을 들여 이를 이뤄낸 걸까.


외모와 치장에 지혜롭게 투자하고 효과를 볼 줄 아는 사람을 존경한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을 잘 아는 사람, 대단하다. 유행에 민감해 이를 잘 따르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저리도 시류를 잘 알고 쫓는 건지 신기하다. (나도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하며 연습을 하고 시도를 했다면 좀 달랐을까 하고 망상/착각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이런 내가 아니겠지요.)




나의 '성배'는 적재적소의 것,  최상이자 최소의 요소 만을 갖춘 깔끔하고 정갈한 삶이다. 소유하는 모든 것이 맡은 역할을 익히 수행하고 정해진 자리가 있어 새로운 것을 들일 필요가 없는, 있는 것으로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그런 깔끔한 생활. 환경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을 미처 감안하지 않은, 내가 나를 가장 모른다는 점을 간과한 이상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또.

나이를 먹으며 줄어드는 시간의 길이를 피부로, 아니, 사시사철 툭하면 정전기가 이는 머리카락과 진한 세로줄이 새겨진 잘 부러지는 손톱으로 생생히 느끼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은 시간을 알차게 채우고 싶지만은 않다고. 사소한 일탈과 뜻밖의 추억이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고. 지극히 정갈하기만 한 삶은  재미가 없을 것 같다. 30대에도 조금 그랬지만 40대엔 처음 해보는, 안 하던 일을 많이 해보며 지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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