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스스로 느끼는 체감 나이와 서류상의 실제 나이가 꼭 들어맞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나이보다 자기가 8살 정도 어리다고 느끼며 산다는데, 이러는 편이 정신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나이. 어릴 때 나이란 같이 노는 친구들 사이에서 호칭(서열?)을 정해주는 잣대였고, 학생 때는 한 살이라도 더 많단 소리를 듣는 게 기뻤고, 20대에는 성인=어른이라는 잘못된 공식에 사로잡혀 끙끙 앓았고... 매년 꼬박 넙죽 나이를 먹으며 이를 대하는 내 생각/태도도 달라졌었다. 본격적인 40대가 된 요즘은 초월자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는 때와 ('나이는 나이고 안 먹을 수는 없으니 그러려니') 세월의 흐름에 살짝 충격을 받는 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나이를 먹었나') 번갈아 십자수를 놓는 중이고.
나이 먹기를 넘어서 늙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시각적 노화는 조급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지만, 체감 나이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 야멸차게 쪼그라든 체력은 아무래도 좀 착잡하다. 내 체감 나이를 무시하는 이 체력이란 놈은 자기 갈길을 곧게 가며 꾸준한 하향선을 그리고 있어서, 이전처럼 성급한 마음 대로 했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고 (예시: 집안 대청소를 반나절에 해치우려고 하거나 갑자기 일주일에 세 번 조깅을 했다간 큰일 난다) 후폭풍도 감당이 안된다- 라고 쓰고 보니, 가만. 은연중에 세워둔 삶의 잣대/기준 중 여러 부분이 지금의 나보다는 과거 어느 시점의 나에게 맞춰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고는 있는데. 과연 나는 그동안 달라져버린 지금의 나를 잘 알고 있는지?
자랄 만큼 자란 다음에는,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어느 정도 확립되고 생활도 안정되며 커리어적 면에서도 어느 지점에 다다르고 난 다음에는, 변화와 새로움의 빈도가 확 줄어든다. 주체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하지 않는 한, 특별히 달라지는 것 없이 (그리고 달라질 필요도 없이) 일-생활-휴식을 그냥 무한반복하며 살 수 있다.
한동안 이런 쳇바퀴를 빙빙 돌았기 때문일까. 달라지지 않는 것 중에서 속절없이 달라지는 것이라곤 바로 나의 체력, 용량, 여유. 갈수록 줄어버린 느끼고 생각할 시간을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 풍경도 취향도 변하고 나라는 사람의 성격/성향이 바뀌었음에도 내가 인지하는 나라는 기준점은 어느 특정한 순간에 박제된 채로 굳어버린 거 같다-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동안 업데이트된 사항이 반영되지 않은, 좀 낡고 오래된 백업본처럼.
10대 시절에는 내 속에 있는 (상상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라 바빴고, 20대에는 내 속을 들여다보고 파악하는데 집중했다가, 30대가 되어선 언제 그랬냐는 듯 온 힘을 바깥으로 쏟으며 나에 대한 생각은 거의 없는 채로 살았다. 물론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도 있고, 이에 맞춰 달라진 것도 있다. 지난날의 일기를 죄 뒤적이며 달라진 과정을 세세히 다 복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내 생각 속 내가 지금의 나랑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인지할 필요는 있겠지, 아는 게 힘이니까. 오늘의 깨달음 끝!
다시 나이 얘기로 돌아가서.
(개인적으론) 나이 먹는 것을 슬퍼하거나 생일을 괴롭게 여기고 싶지 않다. 나도 29살이 됐을 땐 30대를 앞뒀단 생각이 상당히 괴롭고 힘들긴 했지만 (멘붕의 한 해였다, 진짜) 되려 그렇게 충격에서 허우적거리고 나니 차라리 홀가분하더라. 덕분에 서른 살이 됐을 땐 이제 먹을 만큼 먹었으니 계속 먹자! 이런 시원한 기분이 되었었다. 그리고 일을 할 때는 나이보다 너무 어려 보이는 것이 좋지만은 않다. 에이지즘은 양날의 검인지라...
제 모습이 어떤지는 저도 알아요. 제게 선택의 여지가 있나요? 나이를 그만 먹을까요? 모습을 감춰버릴까요? (I know what I look like. I have no choice. What am I going to do about it? Stop aging? Disappear?)
나이를 먹는 것, 얼굴과 몸이 늙는다는 것이 꼭 비참함을 느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치면 우리 엄마 아빠는 늘 슬퍼야 하나? 나보다도 건강하고 활기차고 신나게 사시는 두 분인데? 아니다. 내 속도, 내 기준, 내 삶에 맞는 모습이면 된다. 그뿐이다. 애초에 중장년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청년의 매력과 다른 거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미래가 날 기다리고 있는데 목표점인 할머니가 되려면 차근차근 늙어가야지 갑자기 폭삭 늙을 순 없는 거고. 그러니까.
파리 패션 위크에 파멜라 앤더슨이 민낯으로 등장하면서 일으킨 반향도 참 좋았다. 원래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인지라 다들 열심히 메이크업하고 나타나는 행사에서 자기 혼자 민낯으로 당당하게 나타났을 때 자유롭고 재밌고 반항적인 기분도 들어 좋았다는 그녀. 사람은 늙어가면서 얼굴이 좀 묘하게 변한다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온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진다 말하는, 다 과정이라고 하는 그녀. 참 보기 좋다.
나도 점점 얼굴 윤곽이, 이목구비가, 머리 선이, 달라지겠지. 이미 몸은 착착 알아서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그러니 숙성을 목표로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도록 해봐야지.
10대의 나와 20대의 나, 30대의 나와 40대의 나. 앞으로 50대, 60대, 70대, 그리고 어쩌면 80대와 그 너머까지. 계속 다른 내가 빚어지겠지. 늙었다거나 나이 들었다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내 면모가 계속 드러나면 좋겠다.
마무리는 파멜라 앤더슨 이야기가 나온 김에 <SOS 해상구조대>에서 함께 출연했으며 그와 더불에 <전격 Z 작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데이비드 핫셀호프의 <핑구> 노래로 해본다. (그가 독일에서 상당히 인기를 끈 가수였고 이런 노래도 만들었단 사실은 세월이 가도 신기하기만 해서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