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히 떠오르는 어린 시절 기억이 몇 있었다. 혼자 집을 보다가 피아노 속이 궁금해 애써 뚜껑을 열었다 놓쳐서 눈썹 살이 찝혔던 순간, 할머니 방에서 본 빛줄기 속 춤추는 먼지, 나만의 책상이 갖고 싶어 속 타던 미취학 아동의 마음, 정전된 아파트 마룻바닥에 누워 언니에게 가요를 배우던 어느 오후. 벽에 붙여놓은 엽서처럼 세월에 색이 바랜 그런 조각들. 글을 열심히 쓰던 시절엔 곤충채집하듯 모았는데 이제는 그런 기억이 있었다- 는 것 정도만 떠오를 정도다. 머릿속 사진이 한 줄짜리 이미지 설명(ALT text)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 꼬리를 붙잡아 머릿속에 박제하는 순간이 줄어들어간다. 한 입 먹으면 묵직하게 속에 가라앉는 치즈케이크 같던 기억이 누네띠네 부스러기처럼 가벼워졌다. 뇌리를 스쳐 지나간 순간이 먼지처럼 흩어진다. 코로나 시대로 시간 감각이 사라져서? 멀티태스킹을 너무 많이 해서? 일상이 그럭저럭 안정되어서? 알 수 없다. 매일 꼬박꼬박 쓰는 일기가 있지만 마음의 풍경을 기록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 와서 굳이, 싶기도 하지만 미래의 나를 위해 엽서 같은 기억을, 순간의 마음을 거칠게나마 적어놔야겠다.
아마도 2020년 여름. 가구 외 한 사람만 1:1로 밖에서 만날 수 있던 그때. 거의 매일 친구와 함께 동네를 걸었다. 골목길과 공원과 운하를 맴돌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해가 화창한 그 날, 드물게도 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주말이었을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일을 하는 게 불가능해 쉬게 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갑자기 앰프와 악기를 든 사람들이 두서넛 모였고 작은 동네 공원에서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었다. 전 국민이 매일 같은 시간 총리의 현황 회견을 듣던 그때. 언제 또 뭐가 어떻게 바뀔지 몰랐던, 고요하고 이상하던 그때. 푸른 하늘 아래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앉은 사람들 사이로 울려 퍼지던 음악. 이제는 희미한, 그런 일이 있었지 싶은 기억의 조각을 하나 둘 모아보고 싶다.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