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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Jan 05. 2024

우리는 우주라는 그물의 '그물코'

농민신문/ 시인의 詩읽기 / 이문재 교수

[시인의 詩 읽기] 우리는 우주라는 그물의 ‘그물코’


2024.01.05. 농민신문 이문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그럴 때가 있다

                                      이 정 록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중략)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가끔 대척점을 생각한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지구 중심을 통과하면 닿게 되는 반대편 그곳. 우리나라의 대척점은 우루과이 앞바다라고 한다. 


우루과이 사람과 우리는 서로 다른 쪽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산다. 지구 반대쪽에서 머리가 아니고 발을 마주하고 있다. 서로 거꾸로 서 있는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뭔가를 보아내는 ‘발견의 향연’이 아닌가. 달리 말하면, 연결된 것을 분리하고, 분리된 것을 연결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는 것. 이것이 관계를 (재)발견하는 능력, 즉 시적 상상력의 핵심일 테다. 


우리가 함께 읽는 이정록의 시는, 우리가 관계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구인’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 보인다. 


자동차를 몰다가 덜컹하는 순간은 낯설지 않다. 누구나 흔히 겪는 일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시인은 지구 반대편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 


그뿐이랴. 시인은 저 혼자 떨리는 술잔 앞으로 먼 전장터에서 비탄에 빠져 있는 한 소년을 데리고 온다. 촛불이 꺼질 듯하다 다시 살아나는 순간, 시인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촛불과 동행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저마다 우주라는 거대하고 정교한 그물의 그물코인 것이다.


이 ‘지구인’의 시가 마음 안쪽에 새겨졌다면, 이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장면도 심상치 않게 다가올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 혹은 그 무엇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단상>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말이 생각난다.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살아가는 우리다. 세상은 넓으나 통과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라진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지구인’으로 살아간다. 인류 한 가족을 꿈꾸며, 손가락 닿는 지구 그 어디선가 일어나는 일이 아프고 쓰리다. 뿐만 아니라 나의 경제상황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끼치니 둘러둘러 살피게 된다.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 앞에 놓인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은 생선들은 그물코에 끼이고 치이면서 죽게 된다. 내 마음의 그물코도 너무 작게 두면 이것저것 걸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사는 것이 어렵다. 마음자리를 크게, 성글게 하여 어지간하면 웃고, 넉넉한 마음으로 손 내밀고 싶다. 알면서도 잘되지 않지만 그래도 노력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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