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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슬로 Sep 06. 2023

지난 일

 짧은 소설을 읽었다. 소설은 학창시절 방학 때 가족과 함께 짧은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와 우정을 담은 내용이었다. 우정이라 부르기엔 가벼웠을 수도, 깊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그런 관계. 짧은 그 순간, 빛나던 계절의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했다. 비록 같이 보낸 시간은 짧았고 성향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 때문인지 혹은 본인도 알 수 없는 어떠한 끌림 때문인지 각자의 길을 걸으며, 때론 슬프게, 때론 아프게 서로를 피해가면서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슬프고 우울한 내용이었다. 만남의 시간은 짧았고 이별은 오래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늦은 시간 여러 사람들이 술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는 카페에서 문장을 헤집었다. 주변의 웃음소리나 대화 속에 섞여 들려오는 노래들을 무심히 넘겨들으며 소설을 읽는 중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소설의 내용이 슬프다면 슬프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혹은 느끼지 않았던 내 감정이 너무도 낯설었다. 이런 감정은 나를 침체시키기에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작품에 담긴 감정을 잊지 못했다. 만남의 끝이 이별이라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별을 담담하게 생각했던 내게 이제는 이별이 크게 다가와서인 것만 같았다. 누구와 이별을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어린 시절. 아니,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날의 어리고 작은 생각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성숙하지 못하고 내게 남아있기에 소설이 나를 침체시키지 않았을까. 내 생각은 사춘기를 겪는지, 건장해 보이는 생각의 외면에 비해 이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면은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 필요했던 것 같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방어기제로 잘 버텨왔던 내게 이별이 갑자기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다. 앞으로 다가올 이별이 훨씬 많겠지만 아무래도 이미 겪은 이별들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누군가와는 내 잘못으로, 누군가와는 그의 잘못으로, 또 누군가와는 아무런 이유없이 이별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나의 노력으로 되돌릴 수 있는 이별들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별을 할 때에면 그와 나는 다르다는 잣대로 관계를 한정시켰다. 그렇게 관계를 한정시키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 누군가의 문제로 인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야.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니까 나를 이해할 수 없는거고 당연히 나도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거야. 더이상의 관계는 의미가 없어.'


 얼핏 보면 어떠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람으로부터 도망쳤던 것 같다.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도, 능력도 있지 않았다. 그냥 도망치는 것이 편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그 정도로 한정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더 이상 맞춰나갈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게 편하니까.


 누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사람이 어떻게 잘 맞기만 하냐고, 수십 년을 같이 산 부부도 싸우면서 사는거 아니냐고, 그 차이 속에서 소중한 순간들을 찾을 수 있다고. 날이 적당히 풀려 오랫동안 밖에 있어도 춥지 않았던 초봄, 그 담담한 이야기가 내 마음 깊이 박혀있다. 평범하게 들린 그 말들이 왜 이렇게도 내 마음의 깊은 곳에 내려 앉았는지.


 만남은 늘 지나칠 듯 짧고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이별은 항상 만남보다 길 것이다. 나를 위해, 또 나와 이별을 하는 상대방을 위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 글을 빌어, 성숙하지 못한 나를 탓하며 나의 무책임함, 오만함, 가증스러움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부디 나보다 훨씬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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