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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도 Mar 22. 2023

멈춤: 불길 뒤 재처럼, 마음도 가벼이 내려놓습니다

두피 아래로 화마가 한차례 훑고 지나가고 꼬박 2주는 아무것도 못한 채 침대 신세입니다. 온몸에 힘이 없어서 어떤 가벼운 일상활동에 대해서도 의지를 낼 수 없습니다. 몇미터 걷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집니다. 한쪽 눈은 퉁퉁 부어 시야가 막혀있고, 그나마 남은 한쪽 눈으로 책을 볼래도 시야에 초점이 잡히지 않고, 핸드폰을 보려면 시신경이 따가워져 정말 침대에 누워있는 것 외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담이는 그저 마음만 붙잡고 있습니다.


"정말 제 시력을 가져가실 건가요. 시력을 가져가신대도 겸허히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한쪽 시력이 없어도 그 또한 삶이거늘, 거기서부터 또 살아질 방법이 있겠지요.."


의사선생님께 들은 '실명' 경고에 마음은 꾸준히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담이는 30대 후반의 싱글 여성입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었고, 학창 시절에는 공부라는 본분에 충실하였으며, 좋아하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외국인 앞에서 주눅 들지 않도록 도와주겠다며, 야심 차게 통역사라는 장래희망을 향해 성실하게 걸어가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습니다.


남에게 해 끼치길 크게 꺼려 하고, 뭐라도 도와줄 일이 없을까 능동적으로 찾아 직장에서도 예쁨 받던 사회 초년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싶어 하던 동료, 모든 상사가 탐내던 직원이었고, 첫 직장을 마무리한 후에도 보기 좋게 스카우트되어 당당히 두 번째 직장에서 꿈을 피웠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에 대해 크게 의심을 품을 일이 없었습니다. 늘 확신에 차있었고, 사람을 대할 때 당당했습니다. 나이가 차오르지만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도 딱히 들지 않습니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일 뿐 전혀 안달 낼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에 결혼적령기를 지나는 사람의 수가 늘면서, 마음속엔 미래에 대한 은근한 걱정이 늘 아지랑이처럼 연하게 피어오릅니다.


'난 지금 결혼과 출산을 원하지 않지만, 만약에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어쩌지? 생각이 바뀌어서 너무 간절히 원하는 데 나이가 많아서 원하지만 실현할 수 없으면 어쩌지?'


'혹시 모르니까 '보험 차원에서' 난자 냉동이라도 시켜놓아야 하나?'


주변의 싱글 언니들은 그렇게 아이 타령을 하고, 아이를 원치 않는 담이가 아직 어린 거라 핀잔만 돌아옵니다. 그래서 상담이나 받아보자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의 상담은 친절하지만 간절합니다.


여성 난소기능이 저하되는 시점, 그래프가 꺾이기 전에 해야 한다는 간곡함. 난자의 냉동과 해동과 수정, 착상의 모든 단계에서 발생하는 임팩트가 세포에게 미칠 수 있는 리스크. 그리고 한달 월급은 통째로 삼켜버릴 비용 견적.


보험으로 들기엔 과정의 리스크가 큽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은 난소를 추출하기 전 필요한 한 달 치 영양제를 처방해 주셨습니다. 담이는 내키지는 않지만, 괜히 모르는 미래의 욕구에 대비해야 할 것 같은 불안함에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할 게 없는 담이는 생각이 많습니다. 먹던 약도 생각합니다. 도대체 왜 난자 냉동을 시도하려 했는지 스스로 자문합니다. 결혼 계획도 없으면서 왜 출산부터 걱정을 하는지, 모르는 미래에 무엇이라도 불확실성을 제거해 보려고 '인위적이고' '어거지로' 출산의 가능성을 돈으로 사고 있는 본인의 모습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과 함께 불안을 내려놓습니다.


"그래, 이제는 뭐 억지로 하지 말자..."


약병에 남은 약은 쓰레기통으로 쏟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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