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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흰 Mar 28. 2023

내 남자친구에게

어릿광대에게 보내는 프러포즈


대학 시절, 조금 특이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인문대학 교수님 몇 분이 돌아가면서 각자 연구 분야의 문학 작품을 다루는 강의였다. 이를테면 철학과 교수님은 플라톤의 「군주론」을, 사학과 교수님은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독어독문학과 교수님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강의계획서 상에서는 무척 흥미로워 보이지만 인문대 학생이 아닌 타과생은 수강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배짱에서였는지 덜컥 수강신청을 했다.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개강날 인문대 재학생이 아닌 사람은 나 포함 세 명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번 학기는 쉽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매주 조별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까다로운 수업이었다. 조 구성은 인문대생 사이에서 눈치싸움에 끼지도 못한 타과생 셋으로 구성됐다. 그때 같은 조가 된 사람. 인문대학 강의에 난데없이 나타난 식품영양학과 언니. 그렇게 우리는 인연이 됐다. 다행히 좋은 성적을 받으며 학기는 마무리됐고, 우리는 각자의 학사일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년 뒤, 졸업 후 이곳에서 자리를 잡은 내게 연락이 왔다. 언니 역시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내고 있으니 얼굴 한번 보자고.


유난히도 무더웠던 어느 여름의 금요일 밤, 우리는 낯선 도시의 직장인이 되어 술잔을 기울였다.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 때쯤 언니의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의 직장 동료였다. 그는 혜화에서 같이 한 잔 하자고 했다. 흥이 오르기 시작한 나는 기꺼이 합석 제안에 응했다. 그는 나를 웃기기 위해 오랜 시간 연습이라도 한 듯 내 혼을 쏙 빼놓았고, 그날 밤 내내 박장대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로부터 2년 사이. 기나긴 소송, 건강 문제, 거주하던 집의 강제경매까지 인생의 굵직한 사건들이 밀도 있게 벌어졌고, 휘몰아치는 변화 속에서 난 어학연수를 결심했다. 한동안 떠나있던 한국에 다시 돌아오니 많은 것이 달라진 듯 보였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그간의 나와는 사뭇 다른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결같았다.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내가 그를 잊지는 않게 하는 딱 그 정도의 거리에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안부를 물었다.


"홍상수 영화 풀잎들 개봉했는데 같이 보러 가자."

"대련에 우니만두라는게 있다던데 그거 먹어봤니?"

"나 브이로그 만드는 것 좀 도와줘."


사는 게 어찌나 부질없고 심드렁하던지, 불현듯 앞으로 내 수명이 너무 많이 남아있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드리우던 무렵 그는 말했다. "다흰아 나랑 재밌는 거 많이 하자." 많은 것이 변한 나와는 달리 늘 같은 모습으로 유쾌했던 그와 마침내 연인이 되기로 했다.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겨울을 좋아하는 그와 숱한 여름과 겨울을 함께 맞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이내 세 번째 여름을 맞았다. 세 번째 겨울을 맞을 땐 그는 남편이 돼 있을 것이다.


본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무려 2년 동안 모른 체한 것이 어찌나 얄미웠는지 아냐며, 그는 아직도 종종 분개한다. 그렇게 얄미우면 진작에 고백이라도 하지 그랬냐고 물으니, 그랬다간 더 내가 부담스러워하며 거리를 둘 것이 뻔히 보였다고 한다. 이토록 기민하고 영리한 사람이 고작 얄미움이라는 감정을 거부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직도 난 웃겨 죽겠다.(그리고 엄청 고맙다) 나는 웃긴 사람이 좋고, 그는 웃기는 것을 좋아하니 우리는 서로의 니즈를 제법 충족하는 셈이다. 앞으로 오래도록 그는 나를 웃기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금니가 다 보이도록 크게 웃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같이 나이 들어가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재밌을지 궁리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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