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셋이나 되면 힘들지 않으세요?”
첫째 아들과 세 살 터울 진 아들딸 쌍둥이를 키우는 내가 종종 듣는 말이다. 아유, 어린이집이 다 키워줬어요. 웃으며 손사래를 쳐 보지만 아이를 키우다보면 가끔씩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육아의 단단한 벽을 마주할 때가 있다.
지난 연말, 아이 셋이 동시에 독감에 걸렸던 때가 그랬다. 아이들 모두 열에 들떠 정신 못 차리는 모습도 마음 아팠지만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무작정 누구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 셋을 간호하느라 밤을 꼬박 샌 다음 날, 교감 선생님께 한 소리 들은 끝에 겨우 하루 연가를 쓰고 교실로 돌아와서 훌쩍였다. 직장생활과 육아 모두 해내야 한다는 게 버거웠다. 이런 날은 으레 남편보다 친정엄마가 먼저 떠올랐다.
엄마는 젊은 시절, 면세점에 다녔다. 대학 때 전공한 일본어 덕이었다. 다행히 일은 재미있었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승진이 코앞이었다. 그 동안의 노력이 빛을 막 발하려는 순간 예상치 못했던 내가 생겼고, 곧바로 입덧이 시작되었다. 주위 사람 모두 혀를 내두를 만큼 지독한 입덧 탓에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엄마의 경력은 그렇게 나의 탄생과 함께 단절되었다.
그 후로 남동생이 태어났고 주부로서의 경력이 늘어갔지만 엄마는 여전히 다른 종류의 경력을 꿈꾸었다.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던 해, 엄마는 동네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였다. 낮에는 자격증 공부를 하고 밤에는 타자 연습을 했다. 그렇게 자격증 하나를 따면 그 다음 자격증에 도전했다. 드디어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 있는 문을 찾은 것만 같았다. 문제는 졸지에 엄마의 관심 밖이 되어 심통이 난 일곱 살 난 딸, 바로 나였다.
그 날도 그랬다. 내가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왔지만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컴퓨터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터였다. 어찌나 심심하던지 시계의 초침조차 천천히 움직이는 것만 같은 날이었다. 한참을 뒹굴 거리며 엄마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서러워졌다. 아직은 엄마가 필요한 일곱 살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겁날게 없는 영악한 일곱 살이기도 했다. 나는 곧장 자주색 가죽커버로 덮인 수첩을 꺼내왔다. 엄마가 수기로 적어 놓은 우리 가족 전화번호부였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할아버지, 저 여정인데요. 우리 엄마 거기 있어요?”
“할머니, 저 여정인데요. 우리 엄마 거기 있어요?”
수첩에 적힌 어른들 중 조금이라도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은 어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는 생각에 여럿에게 걸었다.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다 보니 나중에는 외운 대사마냥 말이 술술 나왔다. 그렇게 한참동안 전화를 걸다가 이쯤하면 되겠지 싶어서 멈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가 귀가했다.
그 날 저녁, 엄마는 바빴다. 전화는 계속 울렸고 여러 번의 해명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큰 폭탄이 떨어졌다. 외할아버지의 전화가 온 것이다.
일곱 살의 내가 생각할 때 외할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나였다. 그래서 엄마의 외출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특히 더 자세하고 길게 설명하였다. 예상대로 외할아버지의 천둥같이 큰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한참동안 들려왔다. 정확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긴 통화를 마친 엄마는 어느 때보다 지쳐보였다. 그 날 이후 유치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항상 엄마가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쉼 없이 반복되는 매일이었다. 나는 매일 학교에 갔고, 아빠는 매일 출근 했으며 엄마 또한 육아와 집안일이라는 쳇바퀴를 돌았다. 다만 엄마와 우리의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엄마는 늘 다른 가족들보다 먼저 아침을 열었다는 것이다. 다들 자느라 그 시간만큼은 누구도 엄마를 방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때로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다 막내 동생이 대학교에 들어가던 해, 엄마는 선언했다. 이제는 엄마의 공부를 하겠노라고. 마침내 본인의 꿈을 펼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직장인이 된 내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책상에 앉아 엄마는 하루 종일 공부를 했다. 내가 이른 출근을 하던 날도, 회식 마치고 온 늦은 밤에도 엄마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자를 공부하던 엄마의 옆에는 한자 2급, 1급, 지도사 자격증이 하나씩 쌓이더니 나중엔 우리 지역에 몇 명 없다는 훈장자격증 까지 받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엄마는 학교에 한자강사로 출강을 시작하였다. 그토록 꿈꿔왔던 새로운 경력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 뒤로 올해 10년 째 강사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엄마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 이다. 시 낭송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엄마는 몇 년 전부터 시낭송을 배우고 있다. 한자를 공부하던 것처럼 진심을 다해 매일 연습하고 배우며 가끔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최근에는 3년째 내리 고배를 마시던 대회에서 꿈에 그리던 본선행 티켓을 손에 쥐었다. 여러 번 떨어졌지만 그만두지 않고 긴 길을 돌아 결국 해내고 만 것이 엄마다웠다. 본선은 아직 치러지지 않았으나 설령 이번에 떨어지더라도 언젠간 엄마가 분명히 해내고야 말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렇게 엄마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내가 가야 할 길은 명확해 진다. 나의 경력을 포기하지 말자. 주저함 없이 내가 꿈꾸는 곳으로 나아가고 계속 도전하자.
앞으로도 나는 종종 직장과 아이들 사이에서 쉽지 않은 줄타기를 해야 할 때가 생길 것이다. 때로는 하고 싶은 일이 현실 속 우선순위에 밀려 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성장해가는 나를 믿으며 내 꿈의 방향을 향한 꿈틀거림을 지속할 것이다. 끝없는 길처럼 보이더라도, 목적지로 가는 중간에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꿈은 잠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꿈이 나를 키웠다.
이젠 내가 새로운 꿈을 꾸려 한다. 나의 꿈은 내 아이들을 어떻게 자라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