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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샘 Mar 10. 2024

워킹맘은 어째서 글을 써야 하는가

제습기 단상

 4시 즈음되어 눈을 뜨면 아직 채 깨지 않은 정신을 깰 겸 비몽사몽한 상태로 집안일을 한다.  전날 저녁에 설거지해두었던 그릇을 들여놓고 거실에 나온 장난감이나 책을 정리하며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정신이 든다. 이 시간에 꼭 하는 집안일 중 하나가 바로 세탁물 정리다.      


 우리 집에서 빨래를 말리는 방법은 날씨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보통은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건조대에 빨래를 널면 되지만 요즘처럼 기온이 낮고 볕도 많지 않은 계절에 그렇게 했다간 빨래가 도통 마르질 않는다. 그래서 창문을 모두 닫고 제습기를 틀어두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아침의식엔 밤새 돌아갔던 제습기 물통의 물을 비우는 것까지 포함된다.      


 쭈그려 앉아 베란다 구석에서 빛바랜 제습기의 물통을 꺼내는 건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다. 빨래가 많았던 날엔 물이 가득 차 있어 무거울뿐더러 혹시 잘 못 들었다가는 출렁대던 물이 바닥에 흘릴 수도 있으니 조심스레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꺼내놓고는 마찬가지로 흘리지 않도록 조심히 화장실로 옮겨 세면대에 물을 비워낸다.      


 오늘따라 유난히 물통이 무거웠다. 족히 2l 생수 두 세병은 될 만큼 많은 물이 콸콸 거리며 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어제 하루동안 얘도 참 애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지 않고 모터를 돌려댔으니 이 만한 물을 모았지 싶어 드는 측은한 마음 위로 내가 겹쳤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직장에 다니며 퇴근 후엔 아이들까지 돌보느라 나 또한 종일 제습기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갑자기 밀려오는 고단함에 후두둑 눈물샘이 터졌다.      


 언제부턴가 하나 둘씩 쌓이던 과제는 이제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다. 능숙한 업무처리, 학습훈련이 잘 된 학생들, 예의바르고 뛰어난 인재로 기르기 위한 자녀교육, 깔끔한 집안 살림.. 결코 줄어드는 일 없이 늘어만 가는 업무들을 하기 위해 바빴다. 너무 바빠서 다른 이들에게 건내곤 했던 “괜찮아, 잘 하고 있어.” 라는 짧은 말도 정작 나 자신을 들려줄 여력이 없었다. 바싹 말려진 빨래처럼 내 영혼 또한 바삭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써야 하는구나. 

눈물 닦던 휴지로 코를 팽 푸는 와중에 깨달았다. 책에서 글을 써야 한다길래, 남들도 글을 쓴다길래 덩달아 썼는데, 내가 써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찾았다. 나의 일상을 위로해 주기 위해, 내 영혼이 충만하고 평안하도록 지키기 위해 매일 말과 마음을 갈고 닦아 글로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어둡기만 했던 창 밖이 어느새 환해졌다. 언젠가 내 삶에 서린 막연한 두려움도 이렇게 걷히기를, 그리하여 뚜렷이 내 삶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이 아침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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