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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나먼 여정 May 30. 2024

선생님의 컬렉션

 살다보면 가끔 운수 좋은 날이 있다. 오늘처럼. 우연찮게 생긴 오후의 자유시간에 가고 싶었던 전시회에 다녀왔다. 평일 오후의 관람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호사인데, 입장권 발급차 내민 카드를 되돌려 받았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 오늘일 줄이야. 덕분에 무료 관람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입장 전부터 나를 신나게 했던 전시회는 바로 제주도립미술관의 ‘시대유감’-이건희 컬렉션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그 이름의 영향력은 사후에도 여전했다. 박수근부터 시작해 이응노, 김기창, 강요배, 김환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그의 컬렉션은 마치 한국 근현대사의 미술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그 중에서 나의 시선을 유난히 끌었던 작품은 김기창 화백의 ‘학’이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우리 반 학생 가은이와 나연이를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데서나 양말을 벗어대는 가은이와 가끔 손으로 밥을 집어 먹어 주위 아이들을 질겁하게 했던 나연이는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한 여덟 살 여학생들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싫어한다는 공통점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는데 바로 목소리가 크고 양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주, 자리를 바꾸며 하필 옆에 앉게 된 탓에 둘은 하루에도 뻥 안치고 열 번은 싸우기 시작했다. 전투의지는 높지만 아쉽게도 아직 어휘력과 표현력이 부족한 탓에 싸움 레파토리는 매번 같다. 한 명이 “어쩌라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이 “저쩌라고!”를 말하며 어깨빵(?)을 하는 식이다. 보통의 여자아이들이 몸싸움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싸움을 하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웃긴 건 그렇게 거칠게 싸운 후 5분도 되지 않아 내 앞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과하는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가 미안해.”, “괜찮아. 나도 미안해.” 라고 미리 약속해 둔 대사처럼 말한다. 그 모습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 되풀이 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 아이들을 떠올리며 <학>을 보고 있자니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안간힘을 쓰고 소리지르는 두 마리 학이 마치 “어쩌라고!”,“저쩌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껏 벌린 날갯짓마저 짜증내며 손과 발을 쿵쿵 구르는 그 아이들과 더할나위 없이 똑같다. 그림에 그려진 해와 달도 마치 등교해서 하교할 때 까지 싸우는 그 시간을 표현하는 것만 같다.


나의 기막힌 해석에 스스로 감탄하다 문득 미술관에 와서도 아이들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엄청난 역작들 사이에서 생각하는 게 고작 한글 공부하라고 나누어준 공책엔 낙서를 해 놓는 아이들이라니.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은근슬쩍 가은이와 나연이를 그려 본다. 답도 모르면서 손들어놓고 막상 지목받으면 곤란해 하는 가은이의 난처한 미소나 “선생님, 이거 지금 먹어도 돼요?”라는 말에 답을 하기도 전, 내 손을 낚아채는 나연이의 하얗고 포동포동한 그 손 같은 것들. 어느 누구도 결코 소장하지 못할 나만의 소중한 컬렉션들을 말이다. 아무래도 초등교사로 살아가는 나는 대체적으로 행복한 것 같다.

음, 그런데 오늘따라 출근하기 싫은 건 아무래도 나의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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