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어제는 남은 우울증 약을 다 버렸다. 드디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혹시 모를 대비책까지 떠나보냈다. 평생 먹어야 한다는 약을 혼자서 끊고 충분히 많이 남은 약을 바라볼 때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어딘가 모를 든든함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완전히 놓아준 것이다.
스스로 버리진 못했다. 어제 처음으로 엄마에게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얘기해 줬다. 한동안 내가 다른 사람처럼 굴어서 힘들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간다고 했다. 내가 한동안 너무 막사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잘 견뎌내 줘서 다행이다 기특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이 심장 통증이 지속적으로 찾아온 것도 약의 부작용이었던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엄마가 남은 약도 편하게 버리자고 했다. 엄마에게 평생 꺼내지 못할 거라 생각한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나에게 항상 아픔이지만 집인 당신과 말없는 화해를 한 느낌이었다.
기억력이 유난히 좋은 나임에도 아픈 시간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의 감정과 감각을 뇌가 잊고 싶어 할 만큼 나에게는 어둡고 힘든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내가 나를 죽도록 혐오했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나에게 고통이었다. 사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구나, 죽음을 택한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받는 사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두고 나약하다 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무너짐이 당연했고, 그 시간을 묵묵히 함께 해준 내 사람들이 고맙다. 그것이 연민이든 사랑이든 그들의 방식이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사랑할 힘이 없어도 버틸 수 있던 것은 당신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보였을지는 몰라도 아픈 와중에도 나에게는 쏟지 못하는 사랑을 당신들에겐 최선을 다해서 쏟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생각하고자 주변 사람들에게 내 아픔을 말하고 다녔지만 모두에게 말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나쁜 소식은 나에게 약점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속에서도 나를 폄하하고 기만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단지 언제나처럼 시련 속에서는 내 사람을 가려내는 기회가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했지만 건강하지 않은 감정 상태에 느끼는 배신감은 꽤나 오래 지속됐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지 않은 듯 억지로 웃어 보이는 모습을 얼마나 흘려 봤으면 내가 아픔을 내비칠 때마저 가볍게 여겼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이 싫다면 나만 그러지 않으면 된다는 마음가짐 후로 아픔을 준 사람들을 오히려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자신이 피 흘리는 줄도 모르고 악을 품고자 한 예수의 마음이 감히 조금은 이해가 갔다. 미워하는 것은 되려 자신을 해하는 것임을 벌써 알고 있어서지 않을까.
이제는 무작위적인 사랑을 베풀지는 않지만 나에게 온 사람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천명하고자 한다. 나를 지키고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사랑할 수 있는, 예전 같지만 조금 더 단단한 내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감정과 자아의 충족에서 오는 자아실현 욕구가 이제는 나에게 넘어서야 할 과제다. 번지르르한 껍데기를 포기하고 부족한 스스로를 마주해서 성장해야 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그간 자라난 멋진 날개가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