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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한 May 09. 2024

알약


    빨간색은 그 사람을 완전히 잊는 것, 파란색은 그 사람을 평생 잊지 않는 것. 어느 쪽으로 하시겠습니까?

    그와 함께한 시간과 장소, 추억까지 다, 인가요?

    그와 함께한 시간과 장소와 추억은 물론 그때의 감정까지 다, 그와 함께한 모든 기억을 잊거나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한 모든 것......

    그와 함께한 모든 것.


    그를 잊고 살 수 있을까?

    내 삶에서 그를 빼면 남는 게 있을까?

    하지만 이미 그가 없잖아?

    기억조차 고통이 되지 않을까?


    잊겠다고 할수록 그가 선명해졌다.

    그럴수록 그의 부재가 분명해졌다.


    그러실 줄 알고......

    박사는 서랍 맨 아랫칸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보라색이군요. 이건 어떤 약이죠?

    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랜덤이죠. 어떤 기억은 또렷하게 만들고 어떤 기억은 잊게 합니다. 그 기준은, 저도 모릅니다만. 가장 많은 사람이 선택합니다. 재구매율도 가장 높고요.

    그걸로 할게요.


    ***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며칠씩 울기도 했다. 그럴 때는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약효를 의심했지만 따지러 갈 힘이 없었다. 또 며칠 동안 아무렇지 않았다. 잘 자고 잘 먹었다. 유튜브를 보다 웃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샤워를 하다가 자다가 빨래를 하다가 물을 마시다가. 그런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약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을 믿어 보기로 했다는 생각은 물론, 약을 먹었다는 사실마저 잊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대신 같이 먹었던 그 집 크로와상이 참 포실포실했지, 생각이 들었다. 일 년 만에 그 빵집에 가 크로와상을 샀다. 주인이 다시 봐서 참 좋다고 했다. 그녀는 자주 오겠다고 했다.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 약, 어떤 성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너무 신기해서요.

    박사는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알약을 한 알씩 가져와 접시에 놓았다.

    빨간색은 스트로베리, 파란색은 블루베리, 보라색은 믹스베리.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그중 보라색 약을 입에 넣고 꼭꼭 씹으며 덧붙였다.

    저도 보라색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그래도 감사는 스스로에게 하세요.


    고생 많았다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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