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한 범죄피해를 말하는 경험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 편하게 나누는 대화라고 해도 눈물이 나고 몸이 떨리는 일이죠.
그래서 범죄피해를 생판 모르는 남에게 자세히 말해야 하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고소를 하거나 신고를 한 피해자가 꼭 겪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신고나 고소를 하면 알아서 사건이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닙니다. 사건을 수사하는 사람들은 범행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고소장에 자세히 적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직접 수사관의 얼굴을 보고 진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이야기 한 피해자의 진술 내용이 담긴 서류를 어려운 말로 '진술조서'라고 하는데요, 이건 나중에 법정에서 증거로 제출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서류예요.
자 그렇다면 이 중요한 서류를 처음부터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글에서는 피해를 처음에 수사기관에 말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고소가 아닌 신고부터 보겠습니다. 범죄 피해를 당한 직후이거나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는 다급하게 112에 전화해서 상황을 신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 상황에서 고소장을 차분히 쓰고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이 신고 내용은 다 녹음되고 그 녹취록이 보관됩니다. 그리고 그 녹취록도 형사사건의 증거로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많이 않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증거로 쓰일 수 있는 통화이기 때문에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신고 당시부터 꾸민 정황이 나오면 그 사건은 제대로 수사도 되지 않고 묻혀버릴 가능성이 있거든요. 혹시 휴대전화로 신고하시는 것이라면 녹음기능을 켜고 신고를 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나중에 무슨 내용으로 신고를 했는지 알려면 따로 정보공개청구를 해야 하거든요.
다음으로 고소한 사건을 진술하러 수사기관에 갔을 때 상황입니다. 지난 글에서 적었듯이 고소장은 상대방이(가해자가, 고소를 당한 사람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감안해서 적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와 달리 피해자 조사 때 만들어지는 이 피해자 진술조서는 재판이 열릴 때까지 가해자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범행을 설명해도 된다는 것이죠.
그래도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말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과장해서 말한다거나 확실하지도 않은데 단정적으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이죠. 제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잘 모르는 것인데도 아는 척하고 말하면 안 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면 됩니다.
피해자 진술을 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야 생각이 난다? 그런 경우는 사실 거의 인정되지 않아요.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없어지는 것이지 다시 채워지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계기가 있어서 나중에 또렷이 생각이 나는 경우가 있긴 있습니다. 그래서 최초 진술에서 모른다고 했다가 나중에 뭔가 기억났다면 왜 기억나게 됐는지 그 과정을 잘 설명해야 합니다.
피해를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걸 완전히 다 완벽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해야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받은 피해가 너무 많으면 명확한 피해 위주로 추려서 그 사실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말하고 나머지는 대략적으로만 설명하여 나중에 판사가 양형에 반영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수사기관에 말하러 가기 전에 가급적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말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말하면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기억이 왜곡되고 과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른 사람 중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술을 연습시킨다거나 순서를 정해준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좋은 피해자 진술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피해자 진술의 핵심은 피해자가 날것 그대로의 일을 사실대로 잘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너무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가만히 혼자 앉아서 있었던 일을 시간순서로 정리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습니다.
피해 진술을 하러 가는 분 중에는 장애가 있는 분도 있을 거예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보면 장애가 있는 분은 미리 경찰서에 뭐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도와줄 사람, 점자자료, 수어, 대신 읽어주기, 텍스트리더기 같은 것들이 필요하신 분은 미리 수사관과 일정을 조율하실 때 신청하시면 됩니다.
특히 발달장애인이 피해를 진술하러 가야 하는데 발달장애인의 특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경우라면 미리 경찰서에 연락해서 발달장애인 전담경찰관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이야기하세요. 발달장애인지원법에 따라 그 전담경찰관을 통해 피해진술을 할 수 있거든요.
피해자 조사가 아무리 금방 끝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한 시간은 걸려요. 고소장에 피해 내용을 간단하게 적은 경우이거나, 피해내용 자체가 워낙 많은 사건,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고 관계가 복잡한 사건은 하루 안에 피해자 조사가 안 끝나는 경우도 간혹 있어요. 그러니 컨디션 관리를 잘해서 가셔야 해요.
피해진술 자체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막상 이 글에서 말씀드린 참고사항들, 지켜야 할 일들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들이네요. 중요한 것은 피해를 알리기로 용기를 냈다는 것이에요. 그 용기가 결실을 맺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