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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애인권법센터 May 24. 2023

9. 피해진술 이후, 기다림 잘 버티기

-피해자 국선변호사 활용법

수사기관에 용기를 내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진술) 한 피해자는 이후 어떤 상황을 겪게 될까요?


이상하게도 많은 피해 당사자분들은 여기 쯤 왔을 때부터 점점 더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피해를 진술했으면 마음이 후련하고 홀가분해야 하는데 왜 더 힘들다고 하는 걸까요? 바로 기약없는 기다림 때문입니다.


 

요새 피해자 진술은 대부분 한번으로 끝나는 편입니다. 2020년말까지는 검경수사권조정 전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들고 있는 사건이 검찰로 모두 송치되었었고, 그 단계에서 다시한번 사건을 살펴보면서 검찰에서 피해자를 불러 상황을 확인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거든요.


그런데 2021년부터는 경찰이 사건을 종결할 수 있는 권한, 그러니까 검찰에 사건을 넘기지 않고 자체적으로 끝내는 불송치 권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에서 불송치한 사건은 경찰 차원에서 종결을 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후 기록송부나 이의신청만으로는 검찰에서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 피해자까지 부르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기록송부 : (불송치 결정을 한 사건 기록만 검찰청에 실어 나르는 것)

*이의신청 : (경찰의 불송치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피해자/고소인이 경찰에 이의신청서를 내고 나면 그 불송치결정된 사건은 반드시 검찰로 송치됨)



경찰에서도 심도있는 피해자 조사를 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초기에 사건을 파악하다보면 피해자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할 때도 적지 않은데요. 먼저 피해자쪽 이야기를 듣고 가해자를 불러서 물어보면 피해자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그러면 피해자에게 필요한 부분을 추가로 물어보고 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지난 정부 검경수사권조정과 검수완박을 거치면서 경찰이 대부분의 사건 수사를 떠안게 되었고, 사건에 대한 송치여부 판단(법률적인 판단)까지 해야 하도록 바뀌었기 때문에 정말 과로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충실하게 사건을 파기가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피해자는 겨우 한 번 정도 피해자 조사를 하고, 사건이 끝날 때까지 대체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소식을 듣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 힘들고 어려운 '기다림'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길을 함께 걸어갈, 이 짐을 나눠 짊어질 기관이나 단체의 도움을 받아보시라는 것입니다. 성폭력 상담소나 가정폭력 상담소의 상담원,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의 직원과 같이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피해자를 지원하는 기관이나 단체가 생각보다 많이 있어요. 그 분들이 피해자를 대신해서 사건에 직접 뛰어들 수는 없지만, 피해자와 함께 하거나 피해자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있답니다.


만약 내가 겪은 피해를 지원하는 단체나 기관이 특별히 없는 경우라도 비슷한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모여있는 온라인 공간이 더러 있습니다. 인터넷 카페도 있고 오픈채팅방으로 모이기도 합니다. 어려워하지 마시고 도움을 받으시길 꼭 추천드립니다.




하나 더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피해자 국선변호사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모든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자, 모든 장애인학대사건의 피해자에게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며 피해자국선변호사를 선정해주고 있어요. 2023년부터는 인신매매 피해자에게도 피해자국선변호사가 선정됩니다.

인신매매라는 말이 낯선 분도 있으실텐데요, 성매매와 성적 착취, 노동력 착취, 장기적출 같은 것을 하려고 사람을 모집, 운송, 전달, 은닉, 인계 또는 인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쉽게 말해 나쁜 목적으로 사람을 데려가거나 데려다주는 것, 모으거나 숨기거나 받는 것을 처벌한다는 뜻입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고소장을 낼 때부터 신청할 수 있어요. 만약 내가 피해를 당한 범죄가 성범죄거나 아동학대, 장애인학대, 인신매매 범죄라면 고소를 하거나 신고하면서 바로 피해자 국선변호사를 선정해달라고 하면 됩니다. 피해자국선변호사는 법무부에서 하는 일인데 각 검찰청에서 실무를 담당하고 있어요.

경찰한테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그 경찰이 검찰에 신청을 해서 검찰청에서 그 사건을 맡을 피해자 국선변호사를 선정해서 알려줍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피해자를 위해 무슨 일을 할까요? 한번 선정된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중간에 사임을 하지 않는 한 선정 때부터 대법원 끝날 때까지 한 변호사가 맡아서 지원합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피해자가 최초 피해를 진술할 때부터 함께 옆자리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경찰서가 아니라 해바라기센터에서 진술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가급적 빨리 피해자국선변호사 선정 신청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초기 진술을 다 한 다음에 국선변호사가 나중에 사건으로 들어오면 그 앞에 피해자와 수사기관 사이에 무슨 말이 왔다갔다 했는지 몰라서 사건 지원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거든요.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피해자 진술에 동석하고 사건을 법적으로 정리하여 수사기관(경찰/검찰)이나 법원(판사)에 피해자를 위한 변호인 의견서를 냅니다.

의견서 뿐만이 아닙니다. 수사기관에 '증거'를 내야 할 때 빠짐없이 오해없이 잘 제출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가해자측에서 합의를 원할 때에도 피해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피해자의 국선변호사를 통해 합의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가 기소되어서 형사재판이 열리면 피해자국선변호사는 피해자 대신 재판에 참석하고 (피해자는 재판에 안 가도 됩니다) 어떻게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정말 많은 일을 하는 것이죠. (TMI.. 그런데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일정을 감안해서 재판을 잡지는 않기 때문에 만약에 모든 재판에 다 갈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혹시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선정되지 않는 사건이거나, 피해자 국선변호사 아닌 다른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은 따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새는 범죄자보다는 피해자를 위한 법률지원을 더 열심히 하는 법무법인이나 법률사무소도 많아요.

그런데 그런 곳에 가서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를 돈주고 선임할 형편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피해자의 변호사는 피해자의 역할을 도울 뿐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겪은 일을 차분하게 거짓없이 진술하고, 그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진실을 세상에 드러날 수 있습니다.



비록 시간이 더디게 가고, 가해자는 활개치고 다니는 것 같고, 나만 비참하고 힘든 것 같다고 느껴지더라도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그 짐을 줄어듭니다. 한 사람을 국가 권력이 처벌하는 일은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나만 이렇게 느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시면서 불안해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이 일을 함께 도와줄 기관이나 단체, 그리고 피해자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무거운 짐을 덜어내시길 바라요!



** 이 글을 쉽게 설명한 영상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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