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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ul 21. 2023

세 번째 편지


친구야, 네 인생의 위기는 언제였어? 예정에 없던 둘째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날이 내 삶의 가장 큰 위기이자 고비의 시작이 된 날이었지. 당시 16개월인 첫째 딸을 돌보며 석사 첫 학기를 다니고 있었거든. 뉴욕에 와서 2년 반, 사회적 공백 후 시작한 공부라 힘든 줄 모르고 캠퍼스를 즐기던 나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거야. 가족 하나 없는 외국에서 남편과 나 둘 다 자리 잡지 못한 유학생인데, 웬만하면 무너지지 않는 나도 그날은 눈앞이 캄캄해져 한참 울었어. 하지만 울고 걱정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어. 그때가 11월 말, 추수감사절 연휴쯤이었고 첫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있었거든. 남편이 첫째를 재우러 방에 들어가면 가방을 다시 메고 패밀리 기숙사를 나와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마주했던 춥고 막막했던 밤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구나.


봄날의 햇살, 그대들 


둘째 임신을 알게 된 그날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2년 걸렸어. 모두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참 많았지. 그래도 끝끝내 버틴 건 나를 지지해 준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야. 갑작스레 다가왔던 위로의 순간들이 떠오르네. 임신테스트기 확인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입덧이 시작됐어. 난 오렌지 주스나 간식을 계속 먹어야 헛구역질이 잠시 멈췄거든. 하지만 백 명 넘는 학생들이 함께 보는 기말시험 중엔 음식물 섭취를 할 수 없었어. 결국 담당 교수님을 찾아가 따로 혼자 시험을 볼 수 있게 부탁하기로 했지. 눈물 조절이 안 되는 임신 초기라 울지 말자 백번 다짐했건만 교수님 앞에 앉아 입을 여는 순간, 펑펑 울었단다. 그 며칠 마음속에 쌓였던 두려움과 걱정이 터져 버린 거지. 교수님은 우는 날 보고 깜짝 놀라시며 당연히 시험은 따로 볼 수 있는 거라고 안심시켜 주셨어. 그 후에도 어떻게 뉴욕에 오게 됐는지, 졸업 후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산부인과 의사는 찾았는지 물어보셨고 다정히 내 이야기도 다 들어주시더라. 한참 대화를 나누고 사무실을 떠나는 날 보며 교수님이 해주시던 말을 아직도 기억해. 


“수진, 너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을 자랑스럽게 여길 날이 곧 올 거야. 그러니깐 아무 걱정하지 마.” 


드디어 석사 졸업 가운을 입은 날. 둘째는 저만치 컸었다!


둘째가 10개월 되었을 때 지금 일하는 사무실에서 여름 인턴을 했어. 첫 출근 날, 같은 팀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자연스레 아이가 둘 있다는 사실을 말했지. 애 둘 맘 인턴은 흔치 않으니 다들 살짝 놀라는 눈치였어. 그때 한 여자 팀장님이 그러신 거야. 


“What? Sujin, you’re my hero. My only child was born in the same year as your second. Then, you have not one baby but 2 babies? You’re my hero from today.” 


별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는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일하는 엄마로서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어. 작년에 인기리에 반영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판타지 같은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 나에게도 있었어.


이런 말 한마디가 왜 그렇게 힘이 되었을까? 아마도 엄마, 학생, 그리고 나 자신, 이 다양한 자아를 가진 한 사람으로 온전히 존중받았기 때문일 거야. 판타지 같은 이야기지?  우리 시대의 비극은 직장에서는 ‘엄마’라는 정체성을 지워야 하고 집에서는 ‘일하는’ 엄마의 정체성을 억눌러야 하는 데서 오는 것 같아. 속한 집단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나를 변화시키는 게 당연한 거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난 어떨 때는 억압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일하는 나, 엄마, 사적인 나,  결국 이 정체성이 분리될 수 없다고 봐. 엄마 노릇을 하면서 한 개인으로도 성장했고, 아이를 키우며 얻은 인사이트로 회사에서 더 나은 매니저가 되는 법도 알게 되었어. 모든 게 다 연결된 것 같지 않니? 


우리 안의 여러 정체성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상황에 따라 우리가 가면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서사를 가진 온전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여러 조직에서 다른 빛깔을 내며 어울려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수진 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레퍼

런서의 글>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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