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진 Feb 24. 2023

우리가 사랑하는 이곳, 뉴욕

도시만큼 멋있는 뉴요커들

2020년 3월 12일 목요일, 회사에서 당장 내일부터 원격근무를 시작한다고 알렸다. 2월 29일 뉴욕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났지만, 마지막 출근일까지도 나는 잠깐 지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다시 출근할 수 있을거라며 동료들과 웃으면서 퇴근했고 원격으로 회사 컴퓨터 접속은 잘 될까? 정도만 걱정했다. 그리고 삼 일 뒤 15일 오후에 뉴욕 시장이 모든 학교 수업을 원격으로 전환한다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3/17/2020: 뉴욕시 모든 음식점과 술집 영업 금지 (배달만 가능)

3/22/2020: 뉴욕주지사의 이동제한령 시작

4/11/2020: 뉴욕시 코로나 하루 사망자 775명

6/24/2020: 뉴욕시 코로나 총사망자 22,934명/ 확진자 227,517명

7/6/2020: 레스토랑 outdoor dining만 영업 가능


정부의 대응 타임라인만 보면 2020년 여름부터 뉴욕의 상황이 조금 나아졌겠구나 싶지만 실제로 그 여파는 훨씬 더 심각하고 컸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한 이후 첫 외식을 2021년 6월에 했다. 약 1년 3개월 동안 집밥과 배달 음식만 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미국은 9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하는데 2020년 9월에 개학할 때 부모에게 선택의 기회를 넘겼다. 옵션은 100% 원격 아니면 하이브리드. 우리 가족은 100% 원격을 선택했고 이 얘기인즉슨, 우리 아이들은 2020년 3월 중순에 원격 수업을 시작해 2021년 9월까지 1년 6개월을 학교에 단 하루도 등교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많은 가족이 우리와 같은 선택을 했고 한국보다 훨씬 더 팬데믹의 여파가 심했다.


이렇게 기나긴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지 그 3월에는 몰랐다. 하루아침에 출근하지 않아도 돼서 오히려 일상은 차분해지고 조용해졌다.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었고 천천히 아침 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아이들과 긴 아침 식사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집 밖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3월부터 5월까지 뉴욕의 봄은 끔찍하고 잔혹했다. 뉴욕은 코로나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서너 달 짧은 시간 동안, 이 도시는 약 2만 5천 명 정도의 사람을 잃었다.


출처: https://www.nyc.gov/site/doh/covid/covid-19-data-totals.page


4월 초중순에는 뉴욕시에서만 하루 사망자가 800명이 넘게 나왔다. 집 밖으로 단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 때 정말 몇 분에 한 번씩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살면서 그렇게 사이렌 소리를 자주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엔 잠자리에 누우면 아이가 귀를 막으면서 말했다.


“엄마, 귀에서 계속 앰뷸런스 소리가 울려”


환청이 들리는 것이다. 하루에 수십 번 그 소리를 들으니깐. 그러면 아이를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똑같이 그런 환청이 들렸다. 그래서 내일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려 가고 죽을까 무서웠고 나도 무서워서 아이를 꼭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겐 희망을 품고 말했다.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사이렌 소리가 조금 덜 들릴 거야.




나는 뉴욕시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라서 이 시기에 코로나 대응 업무에 자주 긴급 투입되었다. 기존에 내가 하는 업무랑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당시엔 평일, 주말 가릴 수 없이 온갖 새로운 일을 해보았다. 당시 너무 많은 코로나 환자가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와서 뉴욕주 지사였던 Andrew M. Cuomo가 기자회견에서 미국 전역의 의사, 간호사들에게 뉴욕에 와서 도와 달라고 호소 했다. 기존 인력으로는 도저히 감당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당시 뉴욕시 모든 병원 응급실은 일분일초를 다투고 있었고 단 하나 남은 산소호흡기를 누구한테 먼저 주어야 하는지를 의사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기자회견이 방송되고 나서 전국에서 정말 수많은 의료 종사자가 지원했다. 내가 당시 담당했던 일은 뉴욕에 와서 돕겠다고 한 의료 종사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뉴욕 시립 병원에 와서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사를 묻고, 만약 올 수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뉴욕 시립 병원 시스템에 그분들의 정보를 입력하는 일이었다. 이름, 의사 면허 번호, 현재 근무지 등등 기본적인 정보를 병원 시스템에 넣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서류 작성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거의 100명 가까운 의료 종사자들과 통화를 했다. 모든 분이 정말 진심으로 이 도시를 걱정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거의 모든 의료진이 이곳에 와서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뉴욕의 응급실이 어떤 상태일지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감동에 감동을 더하는 통화를 계속 이어 나가다가 어떤 한 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전화를 걸게 된 배경과 이유를 설명하자 한 신사분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Thanks for calling me. I have lived in this City my entire life. I’m a retired emergency doctor, and I’m ready to go to any emergency room right now. However, I’m 83 years old, and my family disagrees with my decision. I first need to convince my wife, kids, and grandchildren, and then I’ll call you back. Please give me a few hours.”        


전화기 너머로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동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이 노신사가 나의 할아버지라면 아마 나는 무조건 반대했을 것이다. 노인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아직 백신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코로나 환자로 가득한 응급실에 간다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할아버지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차 있었다. 아름다운 나의 도시가, 그 곳에서 함께 살아갔던 동료 뉴요커들이 무너지는 걸 바라만 볼 수 없다는 듯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살리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와 통화를 하는 내내 핸드폰 너머로 우리의 마음이 다 연결된 것 같았다.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절망적인지, 하지만 우린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까지. 마음으로 다 느껴졌다.


사람 간의 관계도 함께 역경을 겪고 나면 그 관계가 더 깊어지듯이 나도 역사에 남을 팬데믹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이 도시와의 관계가 한층 더 깊어진 듯하다. 영화 속 고담시티 같았던 텅 빈 5th Avenue와 타임스퀘어를 보면서 믿을 수가 없어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내가 사랑하던 이 도시의 활기, 에너지, 그 카오스가 다시 살아나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많은 뉴요커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이 도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은퇴한 80대의 그 의사분처럼.


자신이 사는 곳에 이토록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얼마나 될까? 그중 최고봉이 뉴요커라고 생각한다. 두 팔 활짝 벌려 나를 환영해 준 이들,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 이 도시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그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비판에도 열린 사람들.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뉴요커이다. 그리고 나도 이런 뉴요커가 되고 싶다.



커버 이미지 출저: UnsplashJon Tyson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나답게 살고 싶은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