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33. 영화 <빅토리>
1.
1999년, 밀레니엄을 앞둔 거제의 한 고등학교. 그저 춤추는 것이 사는 낙인 필선과 미나는 동아리 방을 얻고자 하지만, 이미 본인들이 벌인 사고로 댄스 동아리가 폐쇄되어 마땅한 방법 없이 학교 화장실에서 춤을 출 뿐이다. 어느 날 새로 전학 온 세현이 서울에서 치어리딩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필선과 미나는 이를 이용해 동아리 방을 얻고자 계획하고 팔자에도 없는 치어리딩을 배우게 된다.
참 힘든 세상이다. 신문을 봐도 뉴스를 봐도 험악한 이야기들이 허다하고, 하다못해 주위 친구들과 만나도 죽는 소리뿐이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세상을 위로라도 하듯 한국 영화 최초로 치어리딩을 전면에 내세운 청춘 영화가 한 편 개봉했다. 영화 <빅토리>는 1984년 거제의 한 여고에서 만들어진 치어리딩 팀 '새빛들' 실화를 각색하여 관객들을 응원하고자 한다.
2.
으레 90년대 배경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90년대 향수를 자극할만한 소재들을 영화 속에 산재해놨다. 이는 영화의 가장 큰 셀링 포인트이기도 하다. 복장과 헤어스타일, 인물들이 듣는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른 가수들, 삐삐와 카세트테이프와 같은 귀여운 소품들까지 아마 90년대 고등학교를 다녔거나 그즈음 기억이 남아 있는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도 꽤 즐거운 눈요기가 될 것이다.
화면 톤 또한 전반적으로 화사하게 꾸며 놓았다. 우리 머릿속 추억을 그대로 영사한다고 가정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를 법한 화사하고 따뜻한 톤으로 구성한 화면은 영화가 추억과 청춘 사이의 어딘가 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3.
의외로 좋았던 점은 영화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들의 모습을 부각하지 않고 착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학생들 심기를 툭툭 건드리는 선생님들도 그 시대의 몇몇 선생님들 정도로 묘사되며 학생들에 대한 악의는 보이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무작정 서울에 올라간 필선은 세상의 쓴 맛이 아니라 오디션을 도와주는 친구와 의외의 성공 기회를 만날 뿐이다. 친구들끼리의 오해도 딱히 없다. 중심이 되었던 필선이 빠지자 투덜대며 흩어지고 필선의 복귀와 함께 싱글벙글 다시 뭉친다.
그나마 가장 큰 악인으로 볼 수 있는 상우조선 과장인 형우가 한 번씩 나와 이것들은 영화의 환상임을 상기시킨다. 형우뿐만 아니라 상우조선 장면 대부분이 현실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와 어우러진다는 느낌보다는 툭툭 튀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디테일한 묘사나 진중한 논의 같은 것까지는 진행되지 않아 수용하고 넘어갈 만하다.
4.
등장인물이 착하다 혹은 영화가 무해하다는 것과 영화가 좋다는 것은 썩 다른 문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가 착하다는 것만으로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콘텐츠든지 아주 잠시라도 정적이 유지되면 따분함을 느끼는 소위 도파민의 시대에 이런 착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의외로 사람을 정화시켜 주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의 문제지만, 가끔 관람하는 이런 착한 영화가 주는 즐거움도 꽤 크다고 본다. 갈등의 고저가 그렇게까지 깊지 않고, 해결 방식 또한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뭉개는 것이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청춘 영화라는 하위 장르를 생각해 봤을 때, 아예 이해 못 할 부분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5.
노래나 춤을 소재로 한 장면을 볼 때마다 '굳이 이렇게까지 길게 보여줄 필요가 있나'라는 의구심을 느끼곤 했다. 이번 영화 또한 마찬가지인데, 영화 시작과 동시에 보여주는 펌프 플레이 장면이나, 영화 중반 부원 모집을 위해 교실을 돌아다니며 춤추는 장면을 보면 분량을 조금 줄여도 괜찮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물론 치어리딩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춤추는 장면을 줄이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한다면 딱히 틀린 반박은 아니지만, 영화 속 춤 자체에 대한 비중과 이미 이번 장면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를 얻었음에도 길게 끌고 가는 춤 장면은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6.
대다수 장면에 농담 하나씩을 끼워 넣어 진지함을 최대한 지우고자 하여 코미디의 빈도가 높다. 이 중 대다수는 웃음 띄게 만들긴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코미디나 거슬리는 말장난들이 없지 않다. 이 또한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치하거나 철 지난 유머로 느껴진다. 코미디뿐만 아니다. 10대~20대 초반의 인물을 주축으로 세우는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다소 작위적인 장면 구성 또한 등장한다. 영화 말미, 다 같이 나란히 서서 '나는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함께 응원할 거다'며 손을 잡고 경기장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은 유치함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7.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큰 기대 없이 보러 갔던 것이 사실이다. 보고 싶어서 봤다기보다는 보아야 하기 때문에 본 경향이 강했으나, 의외로 최근 극장에 걸린 한국 상업영화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꽤 준수한 만듦새를 보여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큰 욕심 없이 감상한다면, 일상 속 작은 힐링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