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유소가맥 Oct 12. 2024

앞서 보였던 광기의 민낯을 드러내는 뒤틀린 데칼코마니

2024_41. 영화 <조커: 폴리 아 되>

스포일러 주의


1.

 다섯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고, 고담시를 혼돈에 빠뜨려놓은 아서 플렉, 현재는 수용소에 갇혀 해당 사건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또 다른 수감자, 리 퀸젤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아서 플렉의 삶은 다시 한번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리로 인하여 아서는 다시 한번 조커를 깨워내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심취한다. 그리고 재판에 들어선 아서는 자기 자신을 변호하며 다시 한번 세상에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2.

 걸출한 전편이 있던 영화인지라 아무래도 <조커>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편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면, 보잘것없는 (과하게 표현하자면) 패배자였던 아서 플렉이 벌인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광기에 물들고, 많은 시민들이 그 광기에 감화되는 과정을 향해 내딛는 영화였다. 이번 <조커: 폴리 아 되>(이하 <조커 2>)는 이와 반대되는, 뒤틀린 데칼코마니 같은 영화다. <조커 2>는 광기에 잠식되어 엉겁결에 유명세를 얻게 된 아서 플렉의 민낯을 속절없이 드러낸다. 때문에 이번 편에서 <조커>가 보여줬던 감정적인 격동이나 카타르시스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아서가 느끼는 수치심만 있을 뿐이다.


3.

 영화 시작과 동시에 나오는 단편 애니메이션은 전편의 서사를 짧게 요약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아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서는 본인이 '아서'일 때 감당하지 못했을 유명세를 조커를 통하여 탐닉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조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저 범죄자가 된 본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애니메이션 내용과 같이 이제 조커는 아서가 컨트롤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본인 스스로도 조커가 될지, 아서로 남을지 결정 내리지 못하여 혼란스러워한다. 아서는 리와 조커 추종자들에게 휘둘릴 뿐이다. 그리고 조커라는 가면을 스스로 내려놓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아서를 떠나버린다. <조커> 말미에서 느꼈던 아서의 내적 흥분은 한순간의 백일몽일 뿐이다. 조커의 유명세를 두고 자신이 인정받은 것이라 착각한 아서가 우쭐대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이 창피하도록 만든다.


 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아서를 휘두르는 인물이다. 리가 아서에게 했던 거의 모든 말은 거짓말이다. 그녀는 아서가 누군지조차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조커라는 환상에 빠진 정신병 환자일 뿐이다. 어쩌면 극 중 조커 추종자들을 한 인물로 응축시켜 놓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리는 아서의 정신병을 더 몰아세우며 조커로 활동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아서가 조커라는 환상을 놓아버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아마 그녀는 그녀의 정신병을 공유할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렇다, 결국 리를 비롯한 추종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조커지 아서가 아니다. 그저 광기를 대변할 어떤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어쩌면 진짜 조커는 사람들 사이에 퍼진 광기 그 자체일 것이다.


4.

 <조커 2>는 이 과정을 뮤지컬 장르를 끌고 와 풀어낸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느낄 1편과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재밌는 변주라고는 생각한다. 다만, <조커 2>라는 영화가 뮤지컬 장르 안에 잘 착상되었느냐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답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아서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병적으로 도피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노래를 선택한 것은 꽤 좋은 표현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조커: 폴리 아 되>

 뮤지컬을 차용한 면에서 볼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노래를 부르는 장면 자체보다도 그 노래를 대하는 아서의 자세였다. 뮤지컬 장르의 암묵적인 전제는 관객이 볼 때는 노래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 중 인물들은 그것을 노래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래를 불러도 극 중에서는 그것이 노래가 아닌 대화를 주고받거나 독백을 하는 것쯤으로 인식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극 말미, 아서가 리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선 이 전제가 들어맞지 않는다. 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아서는 '난 노래 부르기 싫어'라며 극 중 인물이 노래의 존재를 의식하며 장르의 전제를 깨버린다. 이는 아서가 조커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온 순간,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으로 활용된 뮤지컬 또한 끝나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꽤 재밌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5.

 이번 편의 배경은 아캄 수용소와 재판장쯤이 끝이다. 전편에서 고담시 뒷골목들을 적잖이 비추어줬던 것에 비하면 활용 공간이 크게 줄었다. 외적으로 뻗어나갈 수 없다면 방법은 그 안에 있는 인물의 심적 갈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영화는 아서와 리의 관계, 그러고 그로 인한 상호작용에 크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을 보다 풍부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활용한 뮤지컬은 꽤 그럴듯하다.


6.

 다만, 노래가 너무 잦다. 넘버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노래를 부르는 실력들이 형편없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다지 밝지도 않은 톤의 노래가 장장 2시간 반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니 지치는 감이 없잖아 있다. 물론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분명한 패착으로 느껴진다.


영화 <조커: 폴리 아 되>

 리 역할로 레이디 가가를 캐스팅 한 이유에 이 영화가 뮤지컬 장르라는 것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배우 또한 확실히 그 역할을 해준다. 언제부턴가 레이디 가가는 확실히 배우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다.


7.

 <조커>는 아서 플렉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광기에 물들어가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결국 아서 플렉은 어떤 경계선 위에 올라선 위태로운 인물이었다. 요컨대, 캐릭터가 내적으로 제대로 쌓아 올려진 단단한 인물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즉, 아서 플렉은 제대로 된 철학이나 의도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 그저 폭력성을 드러낸 패배자에 가깝다. 보통 그렇게 영화를 진행하면 그다음은 해당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조커 2>는 인물을 더 성장시키기보다는, 그 위태로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오히려 인물을 감싸고 있던 환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무너뜨려버린다. 상업 영화에서 이런 변주를 보는 것이 다소 낯선 감이 있지만, 그만큼 흥미롭고 더 나아가 즐겁기까지 했다.


 개인적으로는 <조커>를 본 몇몇 관객들이 오독하여 받아들인 메시지를 바로잡고자 했을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와 같은 오독 관객이나 혹은 1편의 아서에게 많이 몰입했던 관객들이라면 이번 <조커 2>가 더 불편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노래 부르기 싫다'며 이야기하는 아서의 대사와 함께 1편의 아서에게 몰입했던 관객들의 환상 또한 깨진다. 결국 허상을 따라갔던 1편의 관객들은 리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서가 조커라는 환상에서 깨어난 순간, 리와 함께 1편의 관객들 또한 떠나기 시작한다.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1편에서 2편까지 통으로 보는 것이 더 감정적인 격동이 심하게 올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더 즐거울 수도.


8.

 결론적으로 이런저런 변화들로 인하여 1편과 같은 영화를 기대하고 간 관객들은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1편에 환호했던 팬들의 감정을 부정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실망감은 이해한다. 나 또한 실망까지는 아니지만,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사실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의 속편이 애초에 없었으면 했다. 종종 언급했지만, 한 편의 영화로도 충분히 완결성을 가진 영화는 굳이 속편을 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내 개인적인 의견이기 때문이다. 속편이 얼마나 잘 만든 영화인지를 떠나 이미 완성된 이야기에 굳이 뒷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영화 <조커: 폴리 아 되>

 하지만 그런 내 개인적인 의견은 차치하고, 이 영화가 못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관객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긴 하겠지만, 그 기대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못 만든 영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1편과 같이 보고 나면 (감정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지치는 영화는 맞다. 하지만 그 이유가 조금 다르다.


9.

 개인적인 평가는 그냥 적당히 잘 만든 부분과 적당히 못 만든 부분들이 공존하는 무난한 영화 한 편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워낙 화제작이었고, 전작의 명성과 큰 팬덤이 있다 보니 현재 여론이 지나치게 과열된 것으로 보인다. 낮은 평점을 주는 것도 확실히 이해는 된다. 다만 이렇게까지 평점까지 내려갈 정도일까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나로서 사는 한, 그 존재에겐 충분히 승산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