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47. 영화 <장손>
1.
영화 <장손>은 두부를 만들며 시작한다. 처음엔 뿌연 수증기에 가려 소리만 들리던 것이 연기가 점차 걷어지며 그 현장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간수 속에 흩어져있던 순두부를 끌어모아 사각틀에 넣어 압착한다. 이렇게 완성된 모두부는 그럴듯하게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봤자 결국 연약하고 쉽게 뭉개지는 두부일 뿐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두부를 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 영화에서 보여줄 가족을 직접적으로 비유한다. 가족은 그럴듯하게 하나로 뭉친 집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쉽게 부서져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 두부처럼 하나로 뭉쳤지만 결국엔 해체되고 마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2.
영화는 두 번에 걸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가진 공허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는 다 함께 모여 찍는 가족사진이다. 이는 단순히 나무 아랫사람들을 세워놓고 셔터를 누른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진은 성진이 병상에 누워있는 고모부 얼굴을 어설프게나마 합성시켜 놓은 이후에야 완성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모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수희는 병상에 있는 고모부를 빌미로 고모 혜숙이 돈을 받아가지 않았냐며 고모를 아니꼽다는 듯 비난한다. 두 번째는 묻힌 것 없는 증조부모의 묘다. 사실상 가족들이 모신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땅이다. 구성원 모두가 귀찮아하는 연례행사인 제사는 그나마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으지만 사실 그 대상이 될 실체가 없는 속 빈 행사였다. 이 두 에피소드가 의미하는 바는 '허울뿐인 가족'에 대한 구체적 비유다.
3.
이 가족을 그나마 하나로 뭉치는, 그러니까, 두부 제작 과정 중 압착에 해당하는 것은 가부장제다. 이 케케묵은 시스템이 두부공장을 대물려 굴러가게 만들고 제사를 지내 가족들이 그나마 모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가부장제의 핵심인물은 할아버지 승필을 포함한 세 장손들이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세 장손들은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없다. 단순히 하는 일이 없는 것을 넘어 자의든 타의든 사실상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성진은 제사라는 중요한 집안 행사를 앞두고 택시 안에서 속을 게워낼 만큼 술을 거하게 마시고, 심지어 그 청소 비용으로 물어줄 10만 원 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성진이 연기를 제대로 할 지조차 의문이다. 아버지 태근은 과거 운동권에서 활동하다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한 콤플렉스가 있다. 술을 마실 때마다 표출하는 폭력성이 이를 증명한다. 할아버지는 지독한 반공주의자이며 동시에 어떤 노동을 하기엔 이미 너무 연로한 노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 공백을 메꾸는 것은 결국 집안의 여성들이다. 여성들은 이 집안의 가업인 두부공장에서 노동하는데, 이 두부공장을 물려받도록 내정된 사람은 보탬은커녕 오히려 돈 나가는 구멍인 성진이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반박이나 부정은 없다. 생각해 보면 세 장손의 중 윗세대의 무능은 외부 환경(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화)에 의한 것이지만 성진의 무능은 오로지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를 수습해야 할 여성들은 오히려 그를 옹호한다. 이유는 단순하게도 성진이 집안의 하나뿐인 장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부장제 속 여성들은 중심부에 속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그 체제를 유지하도록 땀 흘리는 노역의 대상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이 강제 노역을 일터와 집안, 모든 방면으로 보여준다.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성별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강제 부역 피해자와 시스템 주변부의 구성원을 오가는 여성들의 모습에 우리는 강한 위화감을 느낀다.
4.
이 불합리 속에서도 현 상태를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 말녀다. 가부장제는 할아버지를 집안 최종 권력자로 봉작했지만, 이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환경과 관계를 조율하는 것은 할머니다. 그런 할머니가 사라진다면 시스템에 금이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고지식하고 지독한 전통의 틈새에 재빠르게 끼어드는 것은 근대의 자본성이다. 정확히는 근대의 자본성을 위시하여 표출된 전통의 부조리함이다. 장례를 치른 후 가족들이 하는 일은 웃으며 부조금을 세는 일이다. 이웃들이 집에 찾아와 할머니가 관리하던 곗돈이 어딨는지 물어보며, 고모는 할머니에게 돈을 맡겨두었다 주장하며 돈의 행방을 찾는다. 그리고 금전으로 인한 이해관계는 서로를 힐난하게 만들고 그나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놨던 구성원들을 해체한다.
5.
이 맥락에서 두부공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성진은 할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성진을 태근으로 착각한 할아버지는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성진은 다른 가족들이라면 하지 못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두부공장을 태근에게 물려주지 않은 이유를 '나처럼 살면 안 되니까'라며 설명한다. 그렇다. 그가 그렇게 집착하던 가업 두부공장은 집안을 대표할 누군가가 물려받아선 안될 치부 아닌 치부다. 이 대사는 두부 공장을 위대한 가업에서 허상(가족의 결속)을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키며 두부 공장 자체의 무의미를 보여준다. 이 순간 극 중 인물들이 러닝타임 내내 가지고 있던 모든 허울의 의미는 사라진다.
위 사건과 더불어 방화 사건 이후 고모를 만나러 간 병원 장면을 살펴보자. 두 장면은 영화 내내 관망자 포지션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던 성진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중심인물이 되는 몇 안 되는 사건이며, 긴장감을 불어넣어 일종의 서스펜스를 형성하여 영화 진행을 고조시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기능은 극 중 인물을 이해할만한 최소한의 숨통을 틔여 놓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최소한'이라는 것이다. "네가 내 자식이었으면 했다", "나도 부모님처럼 생각했다"는 고모와 성진의 대화가 인상 깊다. 사실상 남편도 부재한 상황에 자식(특히 아들)도 없는 상태로 옛사람들의 집에 놓였을 고모의 심정과 자신으로 인해 사고가 났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성진의 감정이 위 대화로 드러난다. 하지만 곧이어 자신이 방화 사건의 범인임을 암시하는 고모, 그리고 고모부가 꽃 알레르기가 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성진을 통해 관객들이 두 사람에게 느꼈을 공감을 다시 한 큰 술 덜어낸다. 이 영화는 내내 모든 인물에게 같은 태도다. 모두에게 정을 둘 여지는 두지만 모두에게 정을 뗄 여지도 함께 둔다.
6.
영화 말미, 기차를 타려는 성진을 따라 나온 할아버지는 성진의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쥐어주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얼추 대화를 마무리 한 성진은 택시에 타 봉투를 열어보는데, 여렴풋이 이전에 쥐여주려던 두부가 들어있을 것이라 예상한 그곳에서 나온 건 의외로 통장이다. 그 통장에는 사라진 곗돈과 맡겨둔 고모의 돈이 들어있다. 성진은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지만 비추는 햇살에 눈이 부셔 표정을 찡그린다. 그가 장손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누리는 분명한 혜택이 있다. 이는 불합리한 제도 위에서 누군가가 겪은 부조리함을 통해 얻은 과실이다. 그렇기에 그 혜택은 분명히 사랑이지만 어딘가 삐뚤어졌고 잘못되었으며 무엇보다 과하다. 마치 따뜻하지만 뜨겁고, 밝지만 눈이 따가운, 그래서 결국 표정을 찌푸리게 만드는 태양빛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