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35.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1.
나는 언제나 한 명의 영화 관객으로 남을 것이다. 뭐 감동적인 영화 예찬이나 영화인으로서의 거창한 다짐 같은 얘기는 아니다. 이제 와서 모든 일을 다 때려치우고 영화 업계에 뛰어들어 한국 영화 시장의 최전선에서 이바지하겠다는 용기는 애당초 나에게 없으니 웬만해선 그저 관객 정도로 남지 않을까,라는 도전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의 고백 정도다. 물론 관객이라는 타이틀이 나쁘지만은 않다. 결국 영화를 완성하는 마지막 한 조각은 극장에서 영화를 만나는 관객들이니까. 그래도 사람이 아예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닌지, 관객이라는 타이틀 안에서나마 내가 희망하는 것이 있다. 나는 항상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영화를 많이 아는' 관객이 되고 싶었다. 이전에도 고백했지만 영화에 관한 한, 나는 지적 허영심이 꽤나 있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나의 '모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나는 늘 '내가 영화 전공자는 아니라서'라든지, '나는 영화를 잘 모르지만'라는 이야기를 꼭 내 의견을 풀어내기 전에 덧붙이고, 더 나아가 '영화계 종사자가 아니라서'라는 말까지 종종 하곤 한다. 우리나라 영화 관객 중 실제 영화계 종사자가 얼마나 된다고. 1~2년 전쯤 실제 영화 전공자들 종종 대화 섞을 일이 생기며 알게 된 나도 몰랐던 대화 습관이다.
2.
나름대로 그 허영심을 채우려고 이것저것 시도는 해봤다만 그렇게 성공적이진 못했던 것 같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부터 글러먹은 건지, 영화 지식도 날로 먹고 싶었나 보다. 세상 사는 것이야 날로 먹기 실패하더라도 인생은 계속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어찌어찌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영화 지식은 내가 굳이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영화 관람 자체가 불가해지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얻고자 하진 않았나 보다. 물론 영화를 해석하는 시야는 넓어지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영화에 대한 큰 지식 없이 꾸준히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
이런 허영심은 시간이 지나며 (나름 철이 들었는지) 예전에 비해 희미해졌고, 나 또한 영화를 전에 비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친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가 보다. 마음 한편에 잘 숨어있다가도 어느 날 예상치도 못하게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몇 해 전 어느 날,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을 볼 때였다.
3.
영화 <경성학교>은 1930년대 경성의 한 기숙학교에서 시작된다. 이상증세를 보이며 사라지는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나지만 학교는 별 다른 반응 없이 평소와 같이 운영된다. 사라지는 학생들과 아무 일 없는 듯 운영되는 학교에 주인공 주란은 의문을 품기 시작하지만 아무도 주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이 와중에 주란에게도 사라진 학생들과 같은 증상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곧 기숙학교의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공개된 줄거리만 보더라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아마 영화 <서스페리아>나 <악마의 등뼈>를 떠올리는 관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 두 영화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탈출할 수 없는 폐쇄된 장소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한 현상들과 실종되는 사람들이 나오는 공포영화라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맥락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관객들을 그렇게 쉽게 보내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는 후반부로 넘어가면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트는데, 아마 이 부분에서 많이 당황하거나 실망한 관객들이 많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애매한 관객들의 평가를 받고 상영을 마무리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
나는 <경성학교>를 한참이나 뒤에 봤다. 개봉 후 내가 영화를 보게 될 때까지 걸린 시간보다 영화를 본 후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이 훨씬 더 짧으니, 이 영화가 개봉한 게 10년이나 됐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개봉 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덕분에 이 영화가 가지고 있던 그 뜨뜻미지근했던 주변 친구들의 반응까지 듣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 평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인 것을 알고 있으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그렇게 별로인가?'라는 생각으로 큰 기대 없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것 아니겠는가.
바로 이때 나의 그 '허영심'이 발동하였다. 지금 이 영화의 '그럴듯함'을 나만 발견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이걸 찾아내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다. 아, 어쩌면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화의 특별한 부분을 찾아내는 특별히 예민한 시각을 이미 가지고 있을지도,라는 생각에 약간 흥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별한 노력은 들이지 않았으나, 늘 새로운 시선과 방대한 지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 한심한 환상이 제대로 발동한 것이다. 같이 봤던 친구에게 '아,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며 농담 섞인 너스레를 떨었던 것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허세는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영화가 너무 좋으면 반응이 뜨거울 것이고, 영화가 영 안 좋다면 반응이 차가웠을 것이다. 뜨뜻미지근한 온도는 뜨거움 반, 차가움 반이 섞여야 한다. 이 얘기는 <경성학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반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다. 영화 감상 후, 드디어 찾아본 영화 평점 사이트에서는 내 예상과 다른 갑론을박이 있었고, 심지어 많은 평론가들은 대부분 꽤 준수한 평가를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에게 그런 남들과 다른 시선이나 지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
4.
그래도 이 경험에서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그 숨어 있던 지적 허영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던 순간, '아, 어쩌면 나는 여전히 영화를 더 알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펼쳐보는 빈도가 줄어들었던 영화 이론서나 평론 책들을 꺼내보는 횟수가 다시금 늘기 시작했다. 휘휘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보면 다시 한번 예전의 '영화를 많이 알고 싶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영화를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영심은 가짜지만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진짜다. 이건 의외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경성학교> 덕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