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다시 역이민을 오게 된 거는

내 인생의 두번째 기회이다.

by 도럽맘

미국에서 비지니스를 시작하겠노라 결단을 한 지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구디사업을 창업한 지 2달이 되어간다. 광고도 웹사이트도 없이 오로지 인스타로만 판매를 진행했는데 오픈 2달 만에 손익분기점을 지나게 되었다. 연말이고 지인찬스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어떤 방향성으로 사업을 이끌지 많은 고민이 되는 요즘이다.


지난 8월 반복되는 육아로 번아웃이 오고 이대로 한해를 흘려보내는 게 너무나 싫었다.

독서를 하고 글을 쓰면서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나고 성장함을 느꼈지만 실제적으로 결단하고 실행하려는 구체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아이에게 경제 교육을 시키면서 나 스스로도 제정에 대한 결핍을 깨닫고 아이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기 위해서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평생 음악만 해왔다. 삼십 대 초반까지 꾸준히 음악 공부만 하면서 연주와 티칭만 해왔다. 전문성을 키우고 그걸로 돈을 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사람이 어찌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평생 살 수 있을까? 혹시나 나에게 불행이 닥쳐져서 더 이상은 음악을 못할 수도 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정말 그랬다.


나는 외국인 목회자와 결혼을 하고 외국에서 살았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음악 하나로 그곳을 점령하기에는 내 스킬은 뛰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니 더없이 연습시간이 줄어들고 손의 근육과 음악적 감각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음악에 미쳐있는 것도 뛰어난 재능자도 아니니 점점 나는 음악이 하기 싫어졌다. 취미라면 모를까 더 이상 음악으로 '먹고' 살기가 싫어졌다. 책을 읽다 보니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굳이 자신의 전공이 아니더라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훌륭한 탐험가들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 또한 그들과 같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고 싶다는 열망이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왜 그곳이 하필 미국일까? 내 고국 한 국도 아니고 남편과 살던 중국도 아닌 미국에서 말이다.


15년 전 나와 남편은 고작 6백만 원을 들고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때의 나는 영포자로 살아온 자와 걸맞게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그런 내가 미국 생활하는 동안에 엄청난 일을 겪었다. 미국사람들만 사는 동네에서 하루 종일 캔디도 팔아보고 1년 반동안 ESL을 미친 듯이 공부해서 미국 대학원에도 지원하여 입학을 했다. 하루에 서네시간만 자면서 공부하고 리포트를 쓰고 연습을 하는 생활을 유지하면서 내가 살아가면서 이만큼이나 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보았을까.. 앞으로 살면서 이보다 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할 만큼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음악 마스터를 마치고 나는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갔다. 커리어 두 개를 끌고 우리 부부는 상하이부터 베이징까지 여행을 하며 거쳐를 찾아 당겼다. 베이징에서 살기로 결단을 내리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나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다들 고작 30대 초반인 나에게 선생님이라며 극존칭을 써가며 줄을 섰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펼쳐보지 못한 날개를 이곳에서는 펼칠 수 있을 거 같다는 기대심에 부풀었다. 그러나 결혼 10년 만에 내게 첫 아이가 선물로 주어졌다. 아이가 생기자 나의 모든 열정과 마음은 오로지 아이에게만 쏟아졌다.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고 좋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 어떠한 시간들보다 귀했고 소중해서 아이를 양육하는데 나는 몰입을 하였다. 나의 음악커리어는 조금씩 사라졌고 나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지금은 무엇보다 아이를 잘 양육하는 게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이제는 음악은 나에게 저 아래 구석에 구겨져 놓아져 버렸다. 하루하루 행복했다. 아이가 자라서 걷고 말을 하고 내 앞에서 재롱을 떨고 나와 점점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에게 피부질환이 생겨 치료를 받는 동안 친정이 있는 제주도에서 제주살이를 하게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한국에서 살게 된 거다. 거진 십 년 만이었다. 미국과 중국에서 살면서 언어적으로 답답했던 불편함이 많았는데 한국에서 사니 진짜 날아다닐 거 같았다. 어떤 대화도 막힘이 없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도서관에 책방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는 게 이렇게 감사하고 행복인 줄 몰랐다. 나는 아이와 손을 잡고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마음껏 책을 읽기 쉽지가 않을 생각에 한국에 머무는 동안 책을 많이 읽자는 생각이 간절했다. 나도 독서와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책들이 활자들이 좋아지기 시작한 건.. 어쩌면 훗날 내가 미국에 와서 아이와 도서관을 다니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사는 동안 우리 가정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나는 전자피아노를 옮기다가 돌석에 걸려 넘어져고 발목 골절과 종아리 골절로 병원에 2달간 입원하고 반년 간 걷지를 못했다. 그 와중에 사역자인 남편과 부교역자들 모두가 중국 경찰들에게 소환이 되었다. 모든 부교역자들과 학생들 남편까지 사라져 버렸던 그날은 울타리에 갇혀만 있던 호랑이가 울타리에서 나와 내게 달려드는 듯한 공포를 주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남편 포함 모두가 조사를 받고 풀려는 나왔지만 신변이 위험해졌고 나와 아이는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힘들게 한국으로 나온 남편과 몇 날 며칠 기도하고 대화하며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우리는 미국으로 다시 역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분명한 응답이 있었고 하마 타면 이산가족으로 살뻔했는데 어디든 못 가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번개처럼 모든 이민 절차를 맞히고 다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거진 8년 만에 다시 돌아온 미국은 여전했다.

거리도 날씨도 하늘도 모든 게 익숙했다. 함께 신앙생활 했던 지인들은 크게 환영을 해줬고

우리가 새 집을 구하는 동안 매일밤 함께 모여 그간의 일들을 나누고 교제를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미국이었다.

남은 여생 중국에서 살아갈 거라 당연히 생각했는데 우리의 인생을 계속해서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지 매일 궁금했고 힘이 들었다.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에 남아계시는 시부모님 걱정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옛 지인들과의 교제도 더 이상 내게 위안이 되지 못했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국의 겉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많이 변하였다. 다들 사느라 바빴고 다들 어려움도 많았다. 그들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지는 것도 민폐였기에 나는 그들이 부담이 가질까 봐 연락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 학교를 정하고 모든 서류 작업들을 마치니 어느새 반년 가까이 지났다. 나는 마음이 점점 공허해졌고 우울증으로 밤낮 울었다. 한국과 중국에 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이 그리웠다. 기약 없는 이별에 답답함이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와 동네 도서관에 들렸다. 그 쾌쾌한 카펫 냄새와 책 냄새가 이상하게 좋았다. 교회에서도 편하지 못했던 마음이 여기에서는 편해졌다. 그 당시 나는 소개로 5천 명 가까이 출석하는 대형교회에 메인 반주자로 섬기고 있었다. 금요철야, 주일 3번의 예배 반주 등으로 몸도 마음도 지쳤다. 일이 되어버린 예배 참석에 내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뺏아기고 주일이 오는 게 싫었다. 피아노 반주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사모라서 선교사라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조심스럽고 불편했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눈물만 삼켜가며 반주를 해오면서 하루하루 힘겹게 미국 이민생활을 이어가던 나에게 도서관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골방 같았다. 분명 그렇게 느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로 가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향했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들 사서님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나도 서가를 기웃거리며 그동안 읽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책의 제목에 눈길이 갔고 그런 책들을 한 권씩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평파적이고 고지식했던 사람이었는지 하나님이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 책에도 쓰인 지식에 내가 지혜를 얻기를 원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에 대한 무지함과 교만함을 깨닫고 부단히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예전 십여 년 전 유학생활 시절, 그 불가능에 도전했던 그 시절 나를 다시 떠올렸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전했던 반짝반짝 빛나던 30대 초반의 나를 말이다. 나와 남편은 쓰리잡도 아닌 다섯 잡을 가지고 산다. 파트타임도 있고 우리 둘의 비지스도 한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세 식구가 먹고살만해졌다.


그런데 내가 또다른 개인 비즈니스를 도전하는 이유는, 돈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올바르게 성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안의 거짓된 두려움과 계속 마주하고 깨트리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국은 기회의 땅이 아닌가. 만약에 내가 여전히 중국에서 살게 되었다면 나는 육아만 하고 가끔 사람들에게 선생님라는 기분 좋은 입바름 칭송이나 들어가며 대강대강 가르치고 연주하는 일만 하다가 살았을 것이다. 싼 물가에 돈도 펑펑 써가면서 돈에 대한 결핍을 쓸데없는 소비들로 만족해 가면서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밤이면 독서를 하는 대신 그리운 한국 드라마나 예능이나 보면서 40대를 맞이하고 또 5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간 그 땅에서 나는 내 영혼부터 갉아먹는 삶이나 사는 한심하고 거짓된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어려운 이들의 아픔과 고통도 공감하지 못한 채.. 우월감에 빠져 그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모순되는 삶을 살 것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우리 가족이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사는 이유를.

선교도 목회도 아닌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는 줄은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거는

난 성장하고 있다.

나를 성찰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땅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때가 차서

다시 어디론가 보내신다면

나는 "감사합니다 주님"하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으면 좋겠다.


미국은 나를 잘 단련시킬 수 있는, 좀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켜 줄 기회의 땅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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