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어떻게 죽고 싶어 할까?
최근 우리 의국 출신 명예교수님의 아버지가 소천하셨다. 고인이 되기 몇 주 전, 집에서 화장실을 가시다 낙상하셨고 대퇴골 전자 간 골절이 발생하여 입원하셨었다. 그간 건강하신 줄로만 알았던 고인이지만 (본인 스스로도 의과대학 교수셨다) 검사를 하면 할수록 심각한 지병들이 발견되었다.
연세가 98세시니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으나 워낙에 정정해 보이셔서 쉽사리 그렇게 생각하지는 못했나 보다. 입원하여 수술 전 검사를 하며 수술 위험도를 평가하는데 다른 동료 교수님들이 수술을 만류하시더라. 동료 교수의 아버지시니 어지간하면 진행해 볼 법 한데 만류하는 것이 그만큼 위험했나 보다. 그래서 결국에는 추가적인 검사, 수술 전 평가 등을 멈추고 편히 지내시던 댁에서 모시기로 하였고, 이틀 후 돌아가셨다.
장례식이 열리게 되었고, 본인도 교수시며 자제분들도 교수 셔서 조문객이 끊인 일이 없었다. 개중에는 교수님의 의대 동기들이 있었고 간단히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되었다. 손님들은 정신과 출신이셨던 것 같고, 교수님께서는 고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해 드렸다. 그중 한 분은 요양병원의 원장님이셨는데, 전자 간 골절이 동반된 노인들을 많이 보셨나 보더라, 전자 간 골절이 발생하면 오래 사시긴 힘들더라고 (실제로 교과서에서 1년 내 사망률이 10-30% 정도로 보고된다고 한다).
요즘은 평균 수명이 지나치게 늘어 장수가 더 이상 행복은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어떻게 죽고, 죽기 전 어떤 삶을 영위하는가가 더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자립 보행'과 '개인위생'이 아닐 수 없다. 혼자서 보행하지 못하면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고, 대소변을 스스로 가리지 못하면 역시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삶의 질, 안위, 인권 등을 해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수님들이 질문을 던졌다.
만일 당신이 독립보행을 하지 못하고, 대소변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이렇게 여쭈시며, 마치 숨겨둔 비밀 이야기를 꺼내는 듯 손으로 잘 들어보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말씀하셨다.
복어의 알을 갈아 잘 말린 가루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걸 잘 가지고 있다가 나는 내가 스스로 걷지 못하고, 똥오줌을 못 가린다면 그것을 들이켤 생각이네. 그러면 몽롱해지면서 아무런 고통도 없이 간다더라고?
그 얘기를 하자 옆에 계시던 정신과 출신 원장님은 '나는 IM succinylcholine을 휴대하고 다닐 생각이야'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시작으로 저마다 본인이 평소에 생각하던,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인 일종의 안락사의 방법에 대한 토론이 펼쳐졌다.
의사들은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들보다 죽음에 가까이 서있는 일이 많다. 나만 하더라도 수련을 받은 요 몇 년간 돌아가신 환자분들이 꽤 많다. 인간의 죽음은 그 가족들에게는 아주 커다란 이벤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이기에. 하지만 그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의사들은 죽음에 쉽사리 둔감해질까?
다른 친구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약간 무뎌졌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감정적으로 큰 사건이, 이성적으로 합당한 사인을 찾게 되면 어느 순간 '아 돌아가실만했네'라고 합리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응당 누군가에게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아주 슬픈 일이 '고인은 이 병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저러한 상황에 빠졌으니, 돌아가실 법했네'라는 이성적인 사고로 흘러가기 쉽더라.
그래서 나에게도 언젠가 '아 죽을만했네'라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그리고 내 개인의 용변과 보행의 자유가 뺏겨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을까? 죽고 싶을까? 아니면... 어떻게 죽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