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고 가느다랗고 선명한_201203
정형외과에 돈을 엄청 집어주고 마는 11월말과 12월초. 발목, 무릎, 손목, 어깨, 그리고 목까지 성한 데가 없고 이제 도수치료를 넘어 고주파 치료도 받아보게 되었다. 말초신경계에 잘 듣는 진통제를 한움큼씩 먹고 있다. 한의원에도 가서 돈을 집어줄 예정이다. 쓰고 싶은 것들을 쓸 수 없고, (돈만 잘 쓴다.) 말이 되어 나올 것 같은 무언가들은 늘 머릿속에 맴돌다 사라진다. 꺼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이 현상은 계속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쓰는 일이 어색해지겠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읽지도 못하는 사람이 될까봐 겁나는 요즘이다.
마인드풀니스, Mindfulness, 지금 현재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어떤 명상의 한 상태라고 하는데, 이 단어를 자꾸 되새기려고 노력한다. 2020년 12월에는 이사도 해야하고, 코로나-19 때문에 왠지 모르게 페르마타처럼 늘어지는 2019년과 2020년을 한꺼번에 정리해야한다.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만난 사람들이 있다. 살아있기 싫다면서도 늘 외출했다 들어오면 손을 씻는 나 자신, 내가 죽는 것뿐이면 괜찮지만 남들까지 죽일 수 없다는 알량한 위선이 하루하루 나를 더 살게 한다. 살면 또 병원비를 축적했다가 한꺼번에 지출할 뿐인데도.
물리치료사. 정형외과의 BM.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단골 병원이 있다는 느낌. 물리치료를 받을 때, 비행기를 탄 것과 같은 효과. 아무도 나에게 닿지 못하고 나 역시 아무에게도 닿지 못할 때의 느낌. 누군가 (돈을 받은 티를 내지 않고) 나를 전적으로 아껴주는 것 같은 ( 누우세요, 천천히 하세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 태도. 듣기 좋은 감미로운 목소리. 삭막한 기계음. 최신 유행 가요. 산재 보험이라는 단어. 탈의실과 거울, 병원 홍보 소재가 되어주는 의학계 드라마. 코로나를 코로라라고 쓴 빌딩 안내문. (코로롸?!.) 진료비 영수증 세부내역서. 실손보험의 한도. 리셉셔니스트 또는 접수계원의 모니터에 뜬 카카오톡 메신저 창.
엠알아이 찍는 건 무섭다. 목을 다친 사람은 전신을 기계에 넣고 엠알아이를 찍어야 하는데, 2017년에 엠알아이 찍을 때 기계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가고 싶었으나 '내보내주세요'라는 말 자체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악마가 귀에 고함치는 것 같은 사운드와 함께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영원히 그럴 것 같아 패닉에 빠져있었다. 차라리 죽었으면하고 멍해지던 때에 소리가 멈췄다. 스르륵 밖으로 나왔을 때 너무 추웠고 힘겨웠다. 인간의 몸은 너무 연약하고 내 정신 상태는 더욱 그러하다. 단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법은 모른다. 당장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의사는 이런 사람에게 수면엠알아이를 권한다고 했다. 아마 돈을 좀 더 집어줘야하겠지. 누군가가 건강이 최고야, 라고 말할 때 건강한 사람들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정말인데.
의자계의 명품이라고 불리는 의자를 내일 결제할 것이다. 병원비를 미리 집어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소비의 요정 칭호에 한발짝 더 다가간다. 누군가 '욜로가 된 것이냐'라고 물었지만 그것은 아니다. 월세도 오르고 지출도 늘어나겠지,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게 내가 욜로가 되기로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가는 일일 뿐이다. 어차피 죽을 때 지니고 갈 것이 없다면 현재에 조금 풀어지는 것도 가끔 필요한 것 같다. 다만 술과 향락을 줄이고,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이나, 우울한 사람들을 덜 우울할 수 있게 하는 일이나, 사회적으로 약한 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복리후생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드는 일들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살아있는 가치가 좀더 있지 않을까 싶은데. "하지만 우선은 나부터 좀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이 생각이 짙은 요즘이다. 내가 잘 살면 남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하루 또 버틴다.